1995년, 탤런트 이창훈은 드라마 《전쟁과 사랑》 촬영을 위해 필리핀으로 떠났다.
낯선 땅, 무더운 공기, 긴 촬영 일정. 제작진과 배우들은 촬영지 근처에 있는 팍상한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
이창훈이 배정받은 방은 317호실이었다.
당시 그는 주연급 배우였기 때문에 제작진의 배려로 비교적 넓은 방을 혼자 쓰게 되었다고 한다. 방 안에는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고, 혼자 지내기에는 오히려 넓고 조용한 방이었다.
첫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그는 몹시 지쳐 있었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멍했다. 그는 짐을 대충 풀어놓은 뒤 곧장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는 점점 또렷해졌다. 마치 바로 옆에서 누군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이창훈은 눈을 떴다.
그리고 침대 앞쪽을 바라본 순간,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방 안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두 명이 있었다.
두 아이는 각각 양쪽 침대 근처에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귀신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피투성이도 아니었고, 얼굴이 일그러져 있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져 있거나, 귀신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여자아이들이었다.
이창훈은 순간적으로 도둑인가 싶었다.
낯선 호텔 방에 모르는 사람이 들어와 있으니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황급히 자신의 지갑을 찾았다.
돈이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두 여자아이 중 하나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도둑도 아닌데 왜 지갑에 돈을 세?”
말투는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마치 그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이었다.
이창훈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지갑을 열어 돈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돈을 셀 때마다 돈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분명 손에 쥐고 있던 지폐가 이상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지갑이 손에서 툭 떨어지더니 침대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창훈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그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촬영 때문에 지친 데다 낯선 호텔에 와서 긴장이 풀린 탓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도 두 여자아이는 그대로 있었다.
이번에는 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방 안에 분명히 있어서는 안 되는 아이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었다.
그때 여자아이 한 명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창훈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문고리를 잡지 않았다. 문을 열지도 않았다.
그대로 문을 향해 걸어가더니, 몸이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순간 이창훈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방 안에 있는 저 아이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문이 혹시 열려 있었던 것은 아닌지 확인했다.

하지만 문은 분명히 잠겨 있었다.
안전고리까지 제대로 걸려 있었다.
그때부터 공포는 시작되었다.
이창훈은 두 여자아이가 밖으로 나갔으니 이제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밤이 되자 상황은 더 끔찍하게 변했다.
저녁이 지나고 그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머리가 이상하게 아팠다. 몸도 무거웠다. 방 안 공기는 눅눅했고, 이유 없이 숨이 답답했다.
그때 귀 근처에서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동시에 목덜미 쪽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스쳤다.
뜨겁고 차가운 감각이 번갈아가며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창훈은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 순간 낮에 보았던 두 여자아이 중 한 명이 공중에 누운 자세로 나타났다고 한다.
마치 침대 위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사람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자세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사랑해.”
“좋아해.”
그 목소리는 달콤하다기보다 섬뜩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었다. 너무 가까웠고, 너무 차가웠다.
이창훈은 눈을 뜨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서워서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밤새도록 뜨거운 숨결과 차가운 기운이 번갈아 그를 괴롭혔다.
귓가에는 계속 속삭임이 들렸다. 어느 순간에는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그는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이창훈은 아무렇지 않은 척 촬영장에 나갔다.
방에서 귀신을 봤다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배우가 낯선 곳에서 예민해져 헛것을 봤다고 여길 수도 있었고, 괜히 촬영 분위기를 어지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호텔에서 귀신을 본 사람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후배 배우 전현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그 역시 방에서 귀신을 보았고, 이창훈과 비슷한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계인 역시 이상한 일을 겪었다.
그는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관문 쪽에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누군가 급한 일로 찾아온 줄 알았다.
소리는 5초 간격으로 반복되었다.
똑똑.
잠시 정적.
또 똑똑.
이계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갔다.
문을 열고 복도를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복도는 조용했다.
사람의 발소리도, 인기척도 없었다.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그는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호텔 거실 쪽에서는 아무도 없는데 농구공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물이 쏟아지는 듯한 이상한 현상을 목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창훈 혼자만의 착각처럼 보였던 일이, 알고 보니 여러 사람에게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창훈은 317호실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방을 바꾸기로 했다.
317호실에서 319호실로 옮기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방을 바꾼 뒤에도 두 여자 귀신은 다시 나타났다.
그들은 방 번호와 상관없이 이창훈을 따라온 것처럼 보였다.
317호실에 묶여 있던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에게 달라붙은 듯했다.
이창훈의 이야기를 들은 동료 민병훈은 혼자 자면 더 무서울 테니 함께 자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밤 민병훈은 이창훈의 방으로 와 함께 머물게 되었다.
이창훈은 누군가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곧 무너졌다.
그날 밤, 두 여자 귀신은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더 심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데려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귀신들은 더욱 거칠게 그를 괴롭혔다.
“왜 다른 사람을 데려왔어?”
그런 원망 섞인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이창훈은 민병훈에게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 민병훈을 바라보기만 했다.
눈으로는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만,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사이 귀신들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숨을 막히게 하고, 몸을 짓누르고, 차갑고 뜨거운 기운으로 밤새 그를 몰아붙였다.
민병훈도 그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창훈을 도와주려 했지만, 이상하게 다가갈 수 없었다고 한다.
침대와 침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마치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은 투명한 막이 그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았다고 한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고, 가까이 가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느낌.
그는 눈앞에서 이창훈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후 사람들은 팍상한 호텔에 얽힌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 호텔 317호실에서는 몇 년 전 여자 두 명이 묵었다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지만, 그 방에서 죽은 두 여자의 원혼이 아직도 호텔 안에 남아 있다는 소문이었다.
또 호텔 곳곳에서 목격된 다른 귀신들 역시, 살해당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말도 있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떠나지 못한 영혼들.
자신들이 죽은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계속 모습을 드러낸다는 이야기였다.
이창훈이 본 두 여자아이도 그런 존재였을까.
낮에는 평범한 사람처럼 나타나 말을 걸고, 밤에는 숨을 막고 목을 조르며 속삭이던 두 여자 귀신.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단순한 장난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죽음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하나다.
1995년, 필리핀 팍상한 호텔에서 이창훈과 여러 배우들이 겪었다고 전해지는 그날 밤의 일은 단순한 악몽으로 넘기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이상한 현상을 겪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317호실이 있었다.
두 개의 침대가 놓인 넓은 방.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했던 방.
그리고 그 방에서 이창훈을 기다리고 있던 두 여자 귀신.
그날 이후, 팍상한 호텔 317호실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공포의 장소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