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7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이었다.
연주에게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회사 후배 혜정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 문자였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었다. 늘 밝고 성품도 좋아서 연주가 유난히 아끼던 후배였다.
그런 혜정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연주는 멍하니 휴대폰 화면만 바라보다가, 결국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마지막 길은 꼭 배웅해야 해.”
장례식장은 경기도 외곽에 있었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그날 서울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써도 어깨가 젖을 만큼 거센 비였다. 연주는 지하철과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며 겨우 장례식장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그렇게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거짓말처럼 그쳐 있었다. 주변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가게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길 양옆으로는 어둡고 검은 들판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전혀 다른 세상에 도착한 것 같았다.
연주는 휴대폰을 꺼내 장례식장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지도 위에는 빨간 점 하나가 찍혀 있었고, 그곳까지 이어진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거리도 멀지 않았다. 지도를 따라 15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조금 으스스하긴 했지만, 시계를 보니 이미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연주는 더 늦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어두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10분쯤 지나자 멀리 장례식장 안내판이 보였다. 연주는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다행이다. 제대로 왔구나.”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다시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켰다. 그런데 화면을 보는 순간, 연주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도착 예정 시간.
25시 24분.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분명 15분, 길어야 2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그런데 휴대폰에는 말도 안 되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연주는 신호가 약해서 오류가 난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한 숫자를 계속 보고 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연주는 휴대폰을 끄고 앞만 보기로 했다. 어차피 길은 하나뿐이었다. 길을 잃을 일도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리 걸어도 장례식장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안내판을 봤는데, 분명 거의 다 온 것 같았는데, 주변 풍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검은 들판, 어두운 길, 희미한 가로등. 마치 같은 길을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앞쪽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우산을 쓴 여자였다.
연주는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 시간에 이 길을 걷고 있다면, 아마 그 여자도 장례식장에 가는 길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기요!”
연주는 목소리를 높였다.
“장례식장 가시는 거면 저랑 같이 가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우산을 쓴 채 천천히 걸어갈 뿐이었다. 연주는 그 여자를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자신이 더 빠르게 걷고 있는데, 여자와의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연주가 걸음을 멈추자, 앞서가던 여자도 멈췄다. 연주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여자도 다시 움직였다.
마치 연주의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부터 연주의 마음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저 사람… 정말 사람 맞아?’
연주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후배의 죽음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대로 있으면 더 무서워질 것 같아 노래라도 부르려고 했다. 소리를 내면 조금은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연주는 애국가를 부르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노래는 전혀 다른 노래였다.
“나의 살던 고향은…”
연주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분명 애국가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입에서는 ‘고향의 봄’이 흘러나왔다.
다시 입을 열어 보았다.
“꽃 피는 산골…”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연주가 부르려는 노래와 상관없이, 입에서는 계속 그 노래만 나왔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연주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길 위에는 자신뿐이었다. 아니, 앞에 검은 우산을 쓴 여자만 있었다.
연주는 다시 조심스럽게 노래를 멈추려 했지만, 입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더 분명하게 들렸다.
누군가가 연주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가까웠다. 아주 가까웠다.
연주는 천천히 앞을 바라보았다.

검은 우산 아래로 여자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얼굴 전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산 그림자 아래, 새빨간 입술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웃었다.
사람의 웃음이 아니었다.
연주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연주는 장례식장 안에 있었다. 길가에 쓰러져 있던 자신을 장례식장 직원이 발견해 데려왔다고 했다. 연주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혜정이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조문을 마친 뒤에는 동료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주는 그날의 일이 너무 놀라고 지쳐서 생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이상한 일은 그 후부터 시작되었다.
며칠 뒤, 연주는 퇴근 후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물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노래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 길에서 들었던 노래였다.
고향의 봄.
그리고 그때 자신을 따라 부르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연주는 깜짝 놀라 욕실 문을 열고 남편을 불렀다.
“여보, 지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남편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소리? 무슨 소리?”
집 안에는 남편밖에 없었다. 연주는 신경이 예민해진 탓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 밤, 저녁을 먹던 남편이 이상한 말을 했다.
“당신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왜?”
“아까 욕실에서 계속 노래 부르던데.”
연주의 손이 멈췄다.
자신은 욕실에서 단 한 번도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다.
“무슨 노래?”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그 노래.”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주의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그 뒤로도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선 순간, 연주는 안방 쪽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검은 형체였다. 자세히 보려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 여자였다.
장례식장 가는 길에서 봤던, 검은 우산을 쓴 여자.

연주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남편이 놀라 달려왔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남편은 연주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라고 했지만, 연주는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착각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연주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검은 우산 아래 새빨간 입술이 떠올랐다. 세수를 할 때도, 머리를 감을 때도,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겨우 선잠이 들었던 연주는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웠고, 창문에는 자신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창문 속 자신의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검은 우산을 쓴 여자였다.
연주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어두운 그림자가 연주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연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검은 우산 아래, 새빨간 입술이 또렷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가 말했다.
“같이 가자.”
그 순간 연주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목이 조여 왔다. 그런데 더 끔찍한 것은, 자신의 두 손이 자기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연주는 필사적으로 손을 떼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같이 가자.”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들러붙었다.
그때 남편이 연주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연주야! 연주야! 그만해!”
남편이 겨우 연주의 손을 떼어냈고, 연주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집에는 친정엄마와 스님 한 분이 와 있었다. 스님은 연주의 옷을 제사상 위에 올려놓고, 칼로 연주의 머리와 몸 주변을 쓸어내리며 기도를 시작했다.
스님은 칼을 바닥에 던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칼날이 계속 연주의 몸 쪽을 향해 멈췄다. 기도를 하고, 칼을 던지고, 다시 기도하고, 다시 칼을 던지는 일이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칼날이 연주의 몸 바깥쪽을 향해 멈췄다.
스님은 곧바로 연주의 옷들을 모두 가지고 나가 태웠다. 그리고 돌아와 연주에게 물었다.
“혹시 사람이 아닌 것에게 말을 건 적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주는 장례식장으로 가던 길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기요. 장례식장 가시는 거면 저랑 같이 가요.”
스님은 그 여자가 외롭게 죽어 이승을 떠도는 영혼이라고 했다. 연주가 그 존재에게 먼저 말을 걸고, 함께 가자고 했기 때문에 그 영혼이 연주에게 붙어 따라온 것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 연주는 웬만하면 장례식장에 가지 않게 되었다.
어떤 장소에는 슬픔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따라오는 무언가도 있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연주는 아직도 비 오는 밤이면 그 노래가 떠오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그 노래가 머릿속에 맴돌 때마다, 연주는 다시 그 외진 길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검은 들판 사이로 난 어두운 길.
앞서 걷는 검은 우산.
그리고 우산 아래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같이 가자.”
그 여자는 지금도 그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그리고 함께 가자고 말해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