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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장례식

작가 모아사 장르 SF 전쟁 아포칼립스 / 외계 침공 / 지진 재난 / 공포 생존 / 디스토피아 전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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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권 지구의 장례식

제3차세계대전은 지구를 폐허로 만들었다. 도시는 불탔고, 바다는 검게 변했으며, 사람들은 지하 벙커와 무너진 터널 속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나 전쟁보다 더 끔찍한 재앙이 찾아온다. 대지진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그 틈을 노려 정체불명의 외계 문명 ‘칼리온’이 지구를 침략한다. 그들은 인간을 정복하려 하지 않는다. 협상도, 항복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류는 제거해야 할 오염물일 뿐이다. 죽은 병사들이 다시 일어나고, 피난소 문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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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장례식

하늘은 검게 멍들어 있었다.

그것은 밤이어서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태양은 떠 있었다. 그러나 태양빛은 지구까지 온전히 닿지 못했다. 먼지, 재, 연기, 방사능 구름, 불타버린 도시에서 올라온 검은 입자들이 대기권 아래에 장막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낮은 회색이었고, 저녁은 붉었고, 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하늘을 보면 죽은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폭격이 시작되기 전, 아이들은 하늘에서 비행기를 찾았다. 연인들은 노을을 보며 사진을 찍었다. 노인들은 내일 날씨를 가늠했다. 그러나 제3차세계대전이 시작된 뒤, 하늘은 언제나 죽음이 내려오는 방향이었다. 미사일, 드론, 정찰기, 낙하 폭탄, 소이탄, 그리고 가끔은 아무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백색 섬광.

처음에는 국가와 국가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마지막 습관이 되었다.

국경은 무너졌다. 수도는 불탔다. 정부는 벙커로 숨어들었다. 방송국은 선전과 거짓말을 반복하다가 하나둘 침묵했다. 위성망은 끊겼고, 인터넷은 지역별 폐쇄망으로 찢어졌다. 사람들은 뉴스보다 소문을 믿었고, 법보다 총구를 믿었다.

서울은 죽어 있었다.

한때 빛으로 가득했던 도시는 콘크리트의 시체가 되었다. 강남의 고층 빌딩들은 허리가 꺾여 서로에게 기대고 있었고, 종로의 오래된 거리에는 불탄 차량들이 뼈처럼 남아 있었다. 지하철역은 피난민들의 무덤이 되었다. 전쟁 초기 수만 명이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산소 부족과 화재, 붕괴, 전염병이 그들을 차례로 데려갔다.

한강은 검게 변했다.

강물 위에는 기름막이 떠 있었고, 부서진 다리의 잔해가 짐승의 갈비뼈처럼 솟아 있었다. 비가 오면 물에서는 금속 냄새가 났고, 강변에서는 죽은 물고기들이 배를 뒤집은 채 밀려왔다. 어떤 날에는 시체도 함께 떠올랐다. 군복을 입은 시체, 민간인 옷을 입은 시체, 이름표가 없는 시체.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누가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어느 편이었는지.

묻는 일에도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보다 더 큰 재앙이 땅속에서 깨어났다.

지진이었다.

처음에는 일본 남쪽 바다였다. 깊은 해저에서 지각이 찢어졌다. 바다는 갑자기 뒤로 물러났고, 항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검은 갯벌과 뒤집힌 배들을 바라보았다. 몇 분 뒤, 수십 미터 높이의 물벽이 해안을 삼켰다. 이미 폭격으로 부서진 도시들이 다시 한 번 바다에 쓸려갔다.

그 뒤로 지구는 연쇄적으로 흔들렸다.

미국 서부 해안이 갈라졌다. 멕시코의 산맥이 무너졌다. 칠레의 해안 도시들이 침몰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는 섬 몇 개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중국 동부의 대도시들은 지반 침하로 가라앉았고,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는 얼어붙은 땅 아래에서 검은 가스가 솟았다.

한반도도 안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전부터 말했다.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라고. 그러나 안전이라는 말은 오래전에 죽었다. 전쟁 중 지하 벙커와 미사일 저장고가 폭파되었고, 지하철과 군사 터널이 무너졌으며, 지각 곳곳에는 인간이 만든 상처가 남았다. 작은 진동은 큰 균열을 불렀고, 큰 균열은 도시의 남은 뼈대를 부쉈다.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을 받쳐주지 않았다.

그런 지구 위에서 한 여자가 오래된 관측 장비 앞에 앉아 있었다.

이름은 한윤서.

전쟁 전 그녀는 지질물리학자였다. 지진파를 읽고, 단층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화산 활동을 예측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쓴 논문들은 전쟁이 시작된 뒤 모두 쓸모없는 종이가 되었다. 세상은 더 이상 과학자의 경고를 들을 만큼 멀쩡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세상이 무너진 뒤에야 사람들은 그녀를 찾았다.

어디가 무너질지 아는 사람.

어느 지하로 들어가면 죽는지 아는 사람.

다음 진동이 자연 지진인지, 지하 폭발인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

윤서는 용산 지하 7층 임시기지에서 살아남은 관측망을 붙잡고 있었다. 지하실 벽에는 물이 새고 있었고, 천장에서는 가끔 콘크리트 가루가 떨어졌다. 방 한쪽에는 군용 배터리와 낡은 발전기가 놓여 있었고, 화면에는 지구 곳곳에서 들어오는 불완전한 지진파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늘 차가웠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잠드는 것이 무서웠다. 눈을 감으면 무너진 도시의 소리가 들렸다. 구조 요청, 아이 울음, 건물이 접히는 소리, 그리고 지하철 터널에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사람들의 손톱 긁는 소리.

그날도 윤서는 모니터 앞에서 눈을 비비고 있었다.

화면에는 이상한 파형이 떠 있었다.

자연 지진과 달랐다.

폭발파와도 달랐다.

처음에는 노이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파형이 일본 해구, 백령도 북서쪽 해역, 대구 남쪽 지하, 몽골 남부, 태평양 심해 관측소에서 반복적으로 잡혔다. 진동의 시작점은 지하가 아니었다. 지표면도 아니었다.

계산상 시작점은 지상 수천 미터 위였다.

윤서는 커피 대신 식수 한 모금을 마셨다. 물에서는 녹슨 맛이 났다.

“말이 안 돼.”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때 철문이 열렸다.

강태준이 들어왔다.

그는 한때 특수전사령부 소속 장교였다. 지금은 ‘지평 방어대’의 현장 지휘관이었다. 지평. 지구의 평화. 전쟁이 미쳐 날뛰던 시기에 누군가 농담처럼 붙인 이름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폐허 속 생존자들이 마지막으로 붙잡는 깃발이 되었다.

태준은 흙과 피가 말라붙은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왼쪽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허리에는 권총과 낡은 군용 칼이 걸려 있었다. 그의 눈은 늘 깨어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어떤 소리에도 놀라지 않으려 애쓰는 눈.

“또 흔들렸나?”

태준이 물었다.

윤서는 화면을 가리켰다.

“흔들린 정도가 아니에요. 누가 땅을 두드리고 있어요.”

“포격?”

“아니요. 포격이면 지표면에서 충격파가 퍼져야 해요. 이건 위에서 내려와요. 하늘에서.”

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드론 폭격?”

“드론은 지각에 이런 파형을 만들 수 없어요.”

윤서는 몇 개의 그래프를 겹쳐 띄웠다.

“이건 너무 규칙적이에요. 자연 현상도 아니고, 인간 무기도 아니에요. 마치 누군가 지구의 단층을 악기처럼 두드리는 것 같아요.”

태준은 말이 없었다.

그는 전쟁 중 수많은 이상한 것을 보았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피난촌, 아무도 조종하지 않는데 움직이는 드론, 방사능 구역에서 빛나는 비, 죽은 도시의 스피커에서 반복되는 아이들의 노래. 그래도 그는 늘 인간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충분히 잔인했고, 충분히 어리석었으며, 충분히 괴물 같았다.

하지만 윤서의 화면은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기지 전체에 경보음이 울렸다.

짧고 날카로운 소리.

지하의 모든 사람이 몸을 굳히는 소리.

스피커에서 끊어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상공 접근 물체 감지. 남서쪽. 고도 4,800. 속도 불명. 열 신호 없음. 반복. 열 신호 없음.”

태준은 곧장 무전기를 잡았다.

“감시조, 영상 보내.”

몇 초 뒤 벽면의 낡은 모니터가 켜졌다.

화면은 먼지바람으로 가득했다. 폐허가 된 도심 너머, 검은 하늘 아래 작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새떼 같았다. 그러나 곧 점들이 커졌다. 그것들은 날개가 없었다. 프로펠러도 없고, 엔진 불꽃도 없었다.

검은 타원형 물체들이었다.

매끈한 금속 표면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다. 표면에는 붉은 선들이 혈관처럼 흐르고 있었고, 물체 주변의 공기는 뜨거운 아스팔트 위처럼 일렁였다. 그것들은 너무 조용했다. 폭격기는 멀리서부터 소리를 몰고 온다. 미사일은 공기를 찢는다. 그러나 저것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도시가 그들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장 큰 물체 하나가 남산의 부러진 탑 위에 멈추었다. 그것은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눈동자 같았다.

그리고 빛이 내려왔다.

하얀 빛이었다.

폭발은 없었다.

굉음도 없었다.

빛이 닿은 건물은 조용히 사라졌다. 불타거나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콘크리트와 유리, 철근이 동시에 회색 먼지로 풀려나며 바람에 흩어졌다. 건물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도 함께 사라졌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비명을 지를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윤서는 숨을 멈췄다.

태준은 낮게 욕을 내뱉었다.

두 번째 빛이 내려왔다.

이번에는 지하철 입구였다. 오래전에 봉쇄된 역이었지만, 그 안에는 아직 사람들이 있었다. 피난민들이었다. 빛이 입구를 핥자,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잿가루처럼 무너졌다. 몇 초 뒤, 땅속에서 둔탁한 진동이 올라왔다.

윤서가 화면을 돌아보았다.

지진파 그래프가 미친 듯이 뛰었다.

“저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빛이 지하 단층을 건드리고 있어요.”

태준이 물었다.

“도시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고?”

“도시는 겉만 부서지는 거예요. 진짜 목적은 땅이에요. 저들은 지구의 내부를 흔들고 있어요.”

“왜?”

윤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것들은 도시를 점령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노예로 삼으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구 자체를 원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과정에서 제거해야 할 곰팡이 같은 존재일 뿐이었다.

그날 밤, 인류는 처음으로 하늘 밖에서 온 적을 보았다.

아무도 공식 발표를 하지 못했다. 발표할 정부가 없었다. 그러나 무전망, 군용 폐쇄망, 지하 인터넷, 생존자들의 불법 주파수, 끊기다 살아난 위성 잔해를 통해 같은 말이 퍼졌다.

“하늘에서 검은 물체가 내려왔다.”

“인간 무기가 아니다.”

“도시가 먼지가 됐다.”

“죽은 사람들이 움직인다.”

마지막 문장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죽은 사람들이 움직인다.

전쟁 중에는 별별 소문이 돌았다. 적국이 시체에 폭탄을 심었다는 이야기. 방사능으로 변한 사람이 밤마다 피난촌을 습격한다는 이야기. 군사 실험으로 만든 괴물이 지하 벙커에 산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번에는 소문이 아니었다.

서울 남부의 한 피난 거점에서 첫 번째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은 흔들리고 있었고, 화질은 나빴다. 지하 주차장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방독면을 쓰고,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화면 앞쪽에는 군복을 입은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분명 죽어 있었다. 가슴이 열려 있었고, 팔 하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일어났다.

움직임은 인간 같지 않았다. 관절이 반대로 꺾이고, 목이 뒤로 젖혀진 채, 그는 손이 없는 팔을 질질 끌며 걸었다. 그의 입에서는 피가 아니라 검은 실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실들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서 꿈틀거렸다.

촬영자가 비명을 질렀다.

죽은 병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 안쪽에서 붉은 빛이 켜졌다.

그 뒤 영상은 끊겼다.

비슷한 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전쟁터에 방치된 시체들이 밤마다 일어났다. 피난소에서 죽은 아이가 엄마의 목소리로 문을 두드렸다. 병원 영안실에서 시체들이 동시에 천장을 바라보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행성 보존 절차 시작.”

그 목소리는 각자의 언어로 들렸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중국어, 아랍어, 프랑스어. 그러나 입 모양은 맞지 않았다. 시체들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스피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하늘에서 모든 사람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어왔다.

“너희 문명은 실패했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귀로 들은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 깊은 곳, 기억과 공포가 섞이는 어두운 방에서 문장이 피어났다.

“행성은 회수된다. 생물학적 오염은 제거된다. 저항은 손실로 계산된다.”

사람들은 그들을 ‘칼리온’이라고 불렀다.

이름의 뜻은 몰랐다. 하늘의 신호 속에서 반복되는 음절이 그렇게 들렸을 뿐이다. 그러나 이름이 붙자 공포는 더 선명해졌다. 알 수 없는 적은 괴담이지만, 이름 있는 적은 전쟁이 된다.

칼리온은 인류와 협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에게 항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항복은 적을 생명체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칼리온에게 인간은 협상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구의 대기, 바다, 지각, 생태계를 분석했고, 인류를 행성 표면의 해로운 증식체로 분류했다.

그들은 지구를 침략한 것이 아니라 청소하러 왔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그들의 공격에는 분노가 없었다.

미움도 없었다.

증오도 없었다.

도살장 기계가 소를 미워하지 않듯, 칼리온은 인간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제거했다.

제3차세계대전은 멈추지 않았다.

다만 방향이 바뀌었다.

서로를 향해 발사되던 미사일은 하늘의 검은 물체를 향했다. 그러나 대부분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핵탄두 하나가 태평양 상공에서 폭발하려 했지만, 폭발 직전 빛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전투기는 이륙 후 몇 분 안에 추락했고, 드론은 칼리온의 붉은 신호를 받으면 주인을 향해 되돌아왔다.

더 끔찍한 것은 죽은 병사들이었다.

전쟁터에 널린 시체들은 칼리온에게 좋은 재료였다. 그들은 인간의 시신을 움직였다. 근육이 끊어진 몸도, 장기가 없는 몸도, 불에 탄 몸도 움직였다. 시체들은 총을 쏘지 않았다. 뛰지도 않았다. 그저 계속 걸어왔다. 느리고, 조용하고, 멈추지 않고.

사람들은 그들을 ‘껍데기’라고 불렀다.

껍데기는 밤에 더 많이 나타났다. 이유는 몰랐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지 않았다. 다만 어둠 속에서 더 쉽게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문 열어.”

“나야.”

“엄마, 추워.”

“살려줘.”

피난소의 문밖에서 죽은 가족의 목소리가 들릴 때, 사람들은 이성을 잃었다. 문을 열면 끝이었다. 껍데기들은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물어뜯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를 붙잡고, 눈을 마주쳤다. 그러면 붙잡힌 사람은 몸을 떨다가 입에서 검은 실을 토했다.

그 뒤에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았다.

칼리온은 인간의 기억을 통로로 삼았다.

용산 지하 7층 기지에서도 밤마다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야.”

처음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한윤서는 의자를 넘어뜨리며 일어났다.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전쟁 첫해 부산 피난항 폭격 때 사라진 어머니. 시신도 찾지 못한 사람. 윤서는 그 목소리를 잊은 줄 알았다. 그러나 문밖에서 들려온 한마디에,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그 목소리를 매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서야, 문 좀 열어.”

철문 너머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엄마 너무 춥다.”

윤서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손은 이미 문 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때 태준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보지 마.”

윤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 엄마 목소리예요.”

“알아. 그래서 보면 안 돼.”

문 아래쪽 틈으로 검은 실이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벌레보다 끈질긴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바닥을 더듬으며 윤서의 발목을 향해 왔다.

태준은 화염탄을 던졌다.

검은 실들이 타들어가며 사람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그날 이후 윤서는 문밖의 목소리를 절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믿지 않는 것과 무너지지 않는 것은 달랐다.

매일 밤 죽은 사람들은 돌아왔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전우, 누군가의 연인. 그들은 문을 두드렸다. 울었다. 애원했다. 가끔은 살아 있을 때만 알 수 있는 비밀을 말했다. 칼리온은 기억을 읽고 있었다. 죽은 자의 기억인지, 살아 있는 자의 죄책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은 가장 아픈 목소리로 찾아왔다.

기지는 서서히 미쳐갔다.

병사 하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격리실 문을 열었다. 다음 날 그는 천장에 매달린 채 발견되었다. 눈은 없었고, 입 안에는 검은 실이 가득했다. 통신병 하나는 죽은 동생과 밤새 대화했다. 아침이 되자 그는 모든 주파수로 칼리온의 문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행성은 회수된다.”

태준은 그를 직접 쐈다.

그 뒤로 기지 안에서는 밤마다 귀를 막고 잠들었다. 하지만 소리는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윤서는 그 공포 속에서도 데이터를 모았다.

칼리온의 지각 타격은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단층을 무작위로 건드리지 않았다. 지구의 약한 지점을 찾아 연쇄적으로 흔들었다. 그 결과, 전쟁으로 이미 불안정해진 지각이 더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새벽, 화면 위에 겹친 붉은 선들을 보며 깨달았다.

“이건 침공 지도가 아니야.”

태준이 물었다.

“그럼?”

“수술 계획서예요.”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지구 단층 지도를 확대했다.

“칼리온은 지구를 죽이려는 게 아니에요. 인간을 없앤 뒤 행성을 안정화하려고 해요. 그러려면 먼저 인간의 지하 시설, 핵 저장고, 벙커, 군사 기지, 대도시 기반 구조를 모두 무너뜨려야 해요. 그들이 지진을 일으키는 이유는 도시를 흔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숨어 있는 땅속을 지우기 위해서예요.”

태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온 놈들이 우리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거군.”

윤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며칠 뒤, 지평 방어대는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장소는 용산 지하의 옛 합동지휘소였다. 전기는 불안정했고, 벽에는 균열이 갔다. 모인 사람은 스물두 명. 국적도, 소속도, 과거도 제각각이었다.

한윤서. 지질물리학자.

강태준. 전직 특수부대 장교.

박무경. 북쪽 출신 공병. 백두산 지하 시설 건설에 참여했던 남자.

리엄 오코너. 미군 조종사였으나 지금은 추락한 항공모함 전단의 마지막 생존자.

세르게이 볼코프. 러시아 무기 기술자. 자신의 조국이 쏜 미사일에 가족을 잃은 사람.

아키야마 렌. 일본 지진학자. 쓰나미로 연구소와 제자들을 잃은 사람.

마리암 하다드. 중동 출신 군의관. 전쟁터에서 너무 많은 아이를 묻은 사람.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생존자들.

전쟁 전이었다면 같은 방에 앉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국적은 과거의 흉터였다. 모두가 다른 언어로 악몽을 꾸었지만, 같은 하늘 아래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윤서는 지도를 띄웠다.

“칼리온의 다음 목표는 동아시아 지각 안정대예요. 그들은 백두산, 일본 해구, 중국 동부 단층을 하나로 연결해 흔들려고 해요. 성공하면 한반도와 일본 대부분, 중국 동부 해안, 러시아 연해주까지 연쇄 붕괴가 일어날 수 있어요.”

누군가 낮게 욕했다.

아키야마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 정도면 쓰나미가 다시 옵니다. 이번에는 태평양 전체가 반응할 겁니다.”

윤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지하 벙커 대부분은 버티지 못해요. 살아남은 인류의 40퍼센트 이상이 지하에 숨어 있어요. 그들이 노리는 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태준이 물었다.

“막을 방법은?”

윤서는 지도에서 백두산을 가리켰다.

“백두산 지하 공진 시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박무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소?”

윤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 전 국제 지진 관측 자료에서 이상한 시설 신호를 본 적 있어요. 공식 명칭은 화산 관측소였지만, 에너지 출력이 관측소 수준이 아니었어요.”

무경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백두 지열 공진기. 지하 깊은 곳의 열과 압력을 이용해 인공 지진파를 만드는 장치요. 원래 목적은 적국 지하 기지를 붕괴시키는 것이었소.”

세르게이가 쓴웃음을 지었다.

“인간은 정말 대단하군. 자기 행성을 부수는 기계를 먼저 만들었어.”

무경은 반박하지 않았다.

윤서가 말했다.

“그 장치가 아직 살아 있다면, 칼리온의 지각 타격파를 반대 위상으로 되돌릴 수 있어요. 그들이 지구를 흔드는 힘을 역으로 증폭시켜서, 하늘의 타격기와 모함에 되돌려보내는 겁니다.”

리엄이 물었다.

“그러면 그들을 격추할 수 있습니까?”

“이론상으로는요.”

“실전에서는?”

윤서는 솔직히 말했다.

“실패하면 백두산이 폭발하고, 우리는 모두 죽어요.”

방 안은 조용해졌다.

죽음은 새삼스러운 단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가 죽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총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굶어 죽고, 누군가는 무너진 지하에서 천천히 죽었다. 백두산을 깨우는 것은 그 모든 죽음을 한꺼번에 부르는 도박이었다.

태준이 말했다.

“시간은?”

윤서는 화면을 보았다.

“칼리온의 주 공격까지 31시간.”

누군가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31시간.

한 문명의 장례식을 막기에는 너무 짧았다.

하지만 기도만 하며 기다리기에는 너무 길었다.

작전명은 ‘지평’으로 정해졌다.

지구의 평화.

너무 낡고 순진한 말이었다. 그러나 폐허 위에서는 그런 말이 오히려 무서운 힘을 가졌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평화라는 단어가 얼마나 비싼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구호가 아니라, 수많은 무덤 위에서 간신히 피어나는 풀잎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북쪽으로 향했다.

차량은 세 대였다. 장갑차 한 대, 수송 트럭 한 대, 낡은 버스를 개조한 이동 통신차 한 대. 연료는 부족했고, 탄약은 더 부족했다. 병력은 스물두 명. 그중 절반은 이미 부상자였다. 그래도 누구도 남겠다고 하지 않았다.

기지를 떠나기 전, 윤서는 용산 지하의 격리실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곳에는 감염된 통신병이 묶여 있었다. 태준이 쏘지 못한 두 번째 감염자였다. 그의 이름은 정우였다. 스물세 살. 전쟁 전에는 대학생이었다. 무전기를 다룰 줄 안다는 이유로 지평에 들어왔고, 밤마다 죽은 동생의 목소리를 듣다가 칼리온에게 붙잡혔다.

그는 침대에 묶인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붉게 변해 있었고, 입술 사이로 검은 실이 조금씩 나왔다 들어갔다.

윤서가 다가가자 정우가 웃었다.

정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윤서.”

윤서는 멈췄다.

정우의 입이 움직였다.

“너희는 늦었다.”

“너희는 누구지?”

윤서가 물었다.

정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관리자.”

“칼리온?”

“너희 발음으로는 그렇게 들린다.”

윤서는 숨을 가다듬었다.

“왜 지구에 왔지?”

정우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너희가 불렀다.”

윤서는 얼어붙었다.

“무슨 뜻이야?”

“핵의 빛. 대기의 상처. 바다의 독. 지각의 비명. 너희 문명은 먼 곳에서도 들릴 만큼 시끄럽게 죽어갔다. 우리는 죽어가는 행성을 회수한다.”

“지구는 너희 것이 아니야.”

“지구는 너희 것도 아니었다.”

그 말은 칼처럼 들어왔다.

정우의 눈에서 붉은 빛이 강해졌다.

“너희는 이 행성의 암세포다. 우리는 수술한다.”

윤서는 이를 악물었다.

“수술이라는 말로 학살을 포장하지 마.”

“학살은 감정의 언어다. 우리는 감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 괴물이야.”

정우의 목 안에서 기계음 같은 웃음이 났다.

“괴물은 거울을 싫어한다.”

그 순간 정우의 입에서 검은 실이 튀어나왔다. 윤서의 얼굴을 향해 뱀처럼 날아왔다. 태준이 뒤에서 그녀를 잡아당기며 화염탄을 던졌다. 불꽃이 격리실을 삼켰고, 정우의 몸이 뒤틀렸다.

그는 타들어가면서도 웃었다.

그 웃음은 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죽은 사람들이 동시에 웃는 소리였다.

윤서는 기지를 떠나며 뒤돌아보지 않았다.

북쪽으로 가는 길은 살아 있는 지옥이었다.

도로는 곳곳이 끊어져 있었다. 폭격으로 생긴 구덩이에는 빗물이 고였고, 그 물 위에는 기름과 피가 얇은 막을 이루고 있었다.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에는 오래된 피난민 캠프가 있었다. 텐트는 찢어져 있었고, 식량 배급소는 불탔다. 벽에는 검은 손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윤서는 그 손자국을 보았다.

아이 손도 있었다.

마리암 군의관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해가 질 무렵, 그들은 의정부 북쪽 폐허에 도착했다. 그곳은 한때 군사 요충지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불탄 전차들이 길 양쪽에 멈춰 있었고, 건물 벽에는 오래된 총탄 자국이 벌집처럼 박혀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무너진 학교 체육관에서 쉬었다.

체육관 바닥에는 낡은 매트와 피난민들이 남긴 담요가 있었다. 벽에는 아직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붙어 있었다. 파란 하늘, 노란 해, 웃는 가족, 나무, 강아지. 전쟁 전의 세상은 벽에 붙은 종이 몇 장으로 남아 있었다.

윤서는 그 그림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태준이 다가왔다.

“잠 좀 자.”

“잠들면 목소리가 들려요.”

“깨어 있어도 들리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날 밤도 목소리는 왔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 같았다. 체육관 지붕의 찢어진 틈으로 먼지가 들어오고, 오래된 철골이 삐걱였다. 그러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선생님.”

윤서는 눈을 떴다.

체육관 문 쪽에 아이가 서 있었다.

작은 여자아이였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였다.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고, 손에는 찢어진 가방을 들고 있었다.

“선생님,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윤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아이가 산 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시대에는 둘의 차이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태준이 조용히 총을 들어 올렸다.

아이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왜 문을 안 열어줬어요?”

그 목소리에 체육관 안의 몇몇 병사들이 눈을 떴다.

아이 뒤쪽 어둠 속에서 더 많은 작은 형체들이 나타났다. 하나, 둘, 셋, 넷. 모두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물에 불은 종이처럼 창백했다.

마리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지 마요.”

아이들이 동시에 말했다.

“우리는 추워요.”

태준이 외쳤다.

“전원 눈 감아! 귀 막아!”

그러나 소리는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기다려요.”

“같이 가요.”

“왜 우리만 죽었어요?”

한 병사가 울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 전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소총에서 떨어지고, 아이들을 향해 뻗었다.

윤서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돼요!”

그 병사의 눈동자가 풀렸다.

“내 반 아이들이야…”

아이들 중 하나가 웃었다.

그 순간 체육관 지붕이 갈라졌다.

하늘에서 붉은 빛이 내려왔다. 칼리온의 정찰체가 학교 위에 떠 있었다. 아이들의 형체가 동시에 찢어지며 검은 실뭉치로 변했다. 그것들은 바닥을 기어 병사들의 발목으로 달려들었다.

총성이 터졌다.

체육관은 순식간에 지옥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이의 모습을 한 것들을 향해 쏘았다. 불꽃이 튀고, 검은 실들이 타면서 아이 목소리로 울었다. 윤서는 구역질을 참으며 화염탄을 던졌다.

태준이 그녀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밖의 하늘에는 검은 정찰체가 떠 있었다. 그것은 작았지만, 인간의 어떤 드론보다 섬뜩했다. 아래쪽에는 눈처럼 보이는 붉은 렌즈들이 여러 개 달려 있었고, 그 렌즈들이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훑었다.

리엄이 휴대용 대공 미사일을 들었다.

“잠금 안 됩니다!”

세르게이가 외쳤다.

“잠금 필요 없어. 가까우면 맞아.”

그는 낡은 로켓 발사기를 어깨에 올리고 그대로 쐈다. 로켓은 정찰체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정찰체가 회피하려는 순간, 리엄이 수동 조준으로 두 번째 탄을 발사했다.

폭발.

정찰체가 검은 불꽃을 뿜으며 추락했다.

그것은 땅에 떨어진 뒤에도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금속 표면이 열리며 안쪽에서 무언가가 나왔다. 기계도 생물도 아닌 것. 회색 막으로 덮인 덩어리, 그 안에서 사람의 얼굴 같은 형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중 하나가 정우의 얼굴이었다.

다른 하나는 윤서의 어머니 얼굴이었다.

윤서는 뒷걸음질쳤다.

태준이 그것을 향해 탄창을 비웠다.

마지막 총알이 박히자, 덩어리는 터졌다. 피가 아니라 검은 먼지가 흩날렸다.

그날 밤 그들은 다섯 명을 잃었다.

총에 맞은 사람이 아니었다.

검은 실에 닿은 사람들은 스스로 목을 긁으며 죽었다. 죽기 직전, 그들은 각자의 죽은 가족 이름을 불렀다.

아침이 오자 체육관 벽의 아이들 그림은 모두 검게 변해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문장이 그 위에 쓰여 있었다.

“장례식은 이미 시작되었다.”

윤서는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불태웠다.

그들은 다시 이동했다.

백두산까지 남은 시간은 18시간.

칼리온의 주 공격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모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구름 속 검은 그림자였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점점 선명해졌다. 그것은 도시 하나만큼 컸다. 둥근 고리 여러 개가 서로 겹쳐져 있었고, 중심부에는 붉은 빛의 심장 같은 것이 천천히 뛰고 있었다.

모함이 지나가는 곳마다 구름이 갈라졌다.

가끔 모함 아래에서 긴 금속 기둥들이 내려왔다. 그것들은 지상에 닿지 않았다. 공중에서 멈춘 채 붉은 빛을 뿜었다. 그러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땅이 갑자기 꺼졌다. 산이 주저앉고, 강의 흐름이 바뀌고, 지하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산 채로 묻혔다.

윤서는 이동 통신차 안에서 지진파를 분석했다.

“저들은 이미 백두산 주변 단층을 건드리고 있어요.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시작할 생각이에요.”

아키야마가 말했다.

“그들이 백두산을 먼저 깨우면, 공진기는 쓸 수 없습니다.”

“알아요.”

“그럼?”

윤서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더 빨리 가야죠.”

도로는 더 이상 도로가 아니었다.

그들은 끊어진 철로를 따라 이동했고, 얼어붙은 강바닥을 건넜다. 곳곳에서 피난민들이 나타났다. 어떤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차량을 향해 총을 쐈다. 식량과 연료를 가진 차량은 이 시대에 움직이는 보물이었다.

태준은 가능한 한 교전을 피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황해도 폐허의 한 검문소에서, 그들은 인간 약탈자들에게 포위됐다. 상대는 군복과 민간복을 뒤섞어 입은 무장 집단이었다. 얼굴은 굶주림과 공포로 뒤틀려 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확성기로 외쳤다.

“차량과 식량을 두고 가라! 그러면 살려준다!”

태준은 차량 위로 올라갔다.

“우리는 백두산으로 간다. 하늘의 놈들을 막을 방법이 있다. 길을 비켜라.”

우두머리는 웃었다.

“하늘의 놈들? 웃기지 마. 우리한텐 오늘 먹을 게 더 중요해.”

윤서는 그 말을 이해했다.

배고픔은 종말보다 가까운 공포였다.

태준은 다시 말했다.

“우리가 실패하면 너희도 죽는다.”

“우린 이미 죽었어!”

그 말과 함께 총성이 터졌다.

싸움은 짧고 잔인했다. 지평 방어대는 훈련된 인원이었고, 약탈자들은 굶주린 생존자들이었다. 그러나 총알은 그런 차이를 모른다. 양쪽 모두 쓰러졌다. 한 약탈자가 수송 트럭으로 뛰어들다가 마리암에게 총을 맞았다. 그는 쓰러지며 품 안에서 통조림 하나를 떨어뜨렸다.

그의 나이는 열일곱쯤 되어 보였다.

마리암은 그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는 아니었어요.”

태준이 말했다.

마리암은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아이였어요.”

전쟁은 늘 그런 식이었다.

방아쇠를 당길 때는 적이었고, 쓰러진 뒤에는 누군가의 아이였다.

윤서는 그 장면을 보며 마음속 어딘가가 더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칼리온이 인류를 암세포라고 부른 이유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 말을 증오했다. 그러나 폐허 위에서 서로를 죽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증오에는 고통스러운 균열이 생겼다.

정말 우리는 지구를 지킬 자격이 있는가.

그 질문이 그녀의 머릿속에 박혔다.

그러나 곧 다른 질문이 따라왔다.

자격이 없는 생명은 죽어도 되는가.

아니었다.

윤서는 주먹을 쥐었다.

인간은 죄가 많았다. 하지만 살아 있는 아이의 배고픔,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눈물, 다친 사람을 끌어안는 손까지 죄는 아니었다. 칼리온은 인간의 악만 보고 인간 전체를 지우려 했다.

그것이 그들의 오류였다.

백두산 지하 시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남은 사람은 열두 명이었다.

산은 이미 깨어나고 있었다.

땅은 낮게 울렸다. 눈과 화산재가 뒤섞여 검은 진흙이 되었고, 곳곳에서 뜨거운 증기가 솟았다. 하늘에서는 칼리온 모함이 백두산 상공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붉은 빛의 기둥들이 산 주변에 떨어질 때마다, 땅속에서 거대한 짐승이 몸을 뒤척이는 듯한 진동이 올라왔다.

시설 입구는 산사태에 반쯤 묻혀 있었다.

강철 문에는 오래된 군사 표식이 남아 있었지만, 대부분 녹슬고 그을려 있었다. 박무경이 문 앞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지나갔다. 죄책감, 두려움, 그리움, 분노.

“여기서 많은 사람이 죽었소.”

그가 말했다.

태준이 물었다.

“언제?”

“전쟁 첫해. 시설 폐쇄 명령이 내려왔지만, 안에 있던 연구원과 병사들을 모두 빼내지 못했소. 상부는 적에게 시설이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지. 그래서 입구를 봉쇄했소.”

윤서가 조용히 말했다.

“안에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무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있었소.”

그는 낡은 손바닥 인식 장치에 손을 올렸다.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경은 장치를 뜯고 내부 회선을 연결했다. 불꽃이 튀었다. 몇 초 뒤, 강철 문이 신음하듯 열렸다.

안쪽에서 뜨거운 공기가 밀려나왔다.

그 공기에는 금속 냄새와 썩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리엄이 중얼거렸다.

“좋지 않은 냄새군요.”

세르게이가 총을 들었다.

“죽은 곳은 다 이런 냄새가 나.”

그들은 시설 안으로 들어갔다.

백두 지열 공진 시설은 지하 도시처럼 거대했다. 터널은 산 아래 깊은 곳으로 이어졌고, 벽에는 두꺼운 케이블과 배관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비상등은 붉게 깜빡였고, 곳곳에 오래된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중앙 축 접근 금지.”

“지열 압력 상승 시 즉시 대피.”

“공진기 수동 점화는 최종 승인 후 실행.”

지하 3층에서 그들은 첫 번째 시체를 발견했다.

방호복을 입은 연구원이었다. 벽에 기대 앉은 채 말라붙어 있었다. 헬멧 안쪽에는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그는 밖으로 나가려 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얼굴을 긁어내려 했던 것 같았다.

마리암이 시체를 확인하려 다가가자, 무경이 막았다.

“만지지 마시오.”

그러나 늦었다.

시체의 헬멧 안에서 눈이 떠졌다.

연구원의 몸이 갑자기 들썩였다. 말라붙은 손이 마리암의 손목을 붙잡았다. 헬멧 안쪽에서 검은 실이 뿜어져 나왔다. 태준이 칼로 그 손목을 내리쳤고, 세르게이가 화염방사기로 시체를 불태웠다.

불타는 연구원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늦었다.”

그 목소리는 정우의 목소리와 같았다.

칼리온은 이미 이곳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더 깊이 내려갔다.

지하 5층부터는 벽에 이상한 것들이 자라 있었다. 곰팡이처럼 보였지만, 금속 광택이 났다. 검은 막이 배관을 덮고 있었고, 그 표면에서 작은 눈 같은 붉은 점들이 깜빡였다. 아키야마가 장비를 들이대자, 막은 살아 있는 피부처럼 움찔했다.

윤서가 말했다.

“칼리온 조직이에요. 기계와 생물 사이의 무언가.”

리엄이 표정을 찌푸렸다.

“그들이 시설을 먹고 있는 겁니까?”

“네. 그리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신경 조직도 같이 이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장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낡은 동요였다.

전쟁 전 학교에서 들을 법한 밝은 노래.

그러나 지하 깊은 곳, 죽은 시설의 복도에서 들리자 그것은 저주처럼 들렸다.

노래 중간에 사람 목소리가 섞였다.

“무경아.”

박무경이 멈췄다.

목소리는 중년 여성의 것이었다.

“왜 나만 두고 갔니?”

무경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윤서가 물었다.

“아는 목소리예요?”

무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스피커에서 다시 목소리가 나왔다.

“문 열어달라고 했잖아. 엄마가 안에서 얼마나 불렀는데.”

태준이 낮게 말했다.

“움직여.”

무경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칼리온은 죽은 사람의 목소리만 흉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죄를 파고들었다. 무경은 이 시설을 봉쇄한 명령 체계의 일부였다. 어쩌면 그의 가족도, 동료도, 이곳 어딘가에 남겨졌을지 몰랐다.

지하 7층에서 그들은 생존자를 발견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다.

한 남자가 복도 중앙에 서 있었다. 군복은 낡았지만 비교적 온전했고, 얼굴에는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는 손을 들고 있었다.

“사람입니다! 쏘지 마십시오!”

모두가 총을 겨눴다.

남자는 울먹였다.

“저는 시설 보안대 소속 이찬우 중사입니다. 봉쇄 후 여기 갇혔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태준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몇 년을 여기서 살았다는 거지?”

“비상 식량과 지하수로 버텼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저 혼자입니다.”

마리암이 속삭였다.

“맥박 확인해야 합니다.”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암이 천천히 다가갔다. 남자는 계속 울고 있었다. 그의 눈물은 진짜처럼 보였다. 손은 떨렸고, 입술은 갈라져 있었다.

마리암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맥박이…”

그 순간 남자의 배가 열렸다.

피부가 갈라진 것이 아니었다. 옷과 살이 동시에 꽃처럼 벌어졌다. 안쪽에는 장기가 없었다. 대신 검은 실뭉치와 작은 붉은 눈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마리암의 얼굴로 튀어나왔다.

태준이 마리암을 밀쳐냈다.

검은 실은 그의 어깨를 스쳤다. 방탄복 표면이 녹아내렸다.

세르게이가 화염을 뿜었다.

남자는 불타면서도 계속 말했다.

“사람입니다! 사람입니다! 사람입니다!”

목소리는 점점 많은 사람의 목소리로 겹쳤다.

“쏘지 마십시오!”

“엄마!”

“살려주세요!”

“문 열어!”

“행성은 회수된다.”

불길 속에서 남자의 몸이 터졌다.

검은 재가 눈처럼 흩날렸다.

마리암은 바닥에 앉아 몸을 떨었다. 그녀의 뺨에는 검은 실이 스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윤서가 급히 소독제를 부었다. 마리암은 비명을 삼켰다.

“괜찮아요?”

윤서가 물었다.

마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지만, 걸을 수는 있어요.”

그들은 계속 내려갔다.

중앙 제어실은 지하 12층에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불길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백두 지열 공진기가 있었다. 세 겹의 금속 링이 수직으로 겹쳐져 있었고, 그 아래로 지구 깊은 곳까지 이어지는 검은 축이 내려가 있었다. 링 주변에는 수많은 제어 장치와 냉각관, 압력 조절기가 있었지만, 대부분 칼리온의 검은 막에 덮여 있었다.

공진기는 살아 있었다.

낮은 진동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 진동은 심장 박동 같았다.

아니, 장례식 북소리 같았다.

윤서는 제어판 앞에 앉았다. 손전등을 고정하고, 손상된 회선을 우회했다. 화면 하나가 켜졌다. 오래된 시스템은 느리게 부팅되었다.

“작동 가능해요.”

모두가 숨을 삼켰다.

“하지만 칼리온 조직이 제어계 일부를 장악했어요. 우리가 공진기를 켜면 그들도 동시에 역추적할 거예요.”

태준이 말했다.

“막아야겠군.”

“그리고 수동 점화가 필요해요. 중앙 축 아래로 내려가서 직접 연결해야 해요.”

박무경이 눈을 감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겠소.”

윤서가 곧장 말했다.

“아니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

무경은 담담하게 말했다.

“결정할 것도 없소. 나는 이 시설 구조를 알고 있소. 다른 사람이 가면 길도 못 찾고 죽을 거요.”

태준이 그를 보았다.

“혼자 보낼 수는 없다.”

“누군가는 위에서 막아야 하오.”

그때 시설 전체가 흔들렸다.

상공의 칼리온 모함이 백두산을 직접 타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붉은 빛이 산 위로 떨어질 때마다, 지하의 압력계가 치솟았다. 화면 곳곳에 경고가 떴다.

윤서가 외쳤다.

“시간 없어요! 주 공격 시작됐어요!”

태준은 무경에게 수동 연결 장치를 건넸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경이 말했다.

“남쪽 군인과 내가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소.”

태준이 대답했다.

“나도 북쪽 공병에게 지구를 맡기게 될 줄은 몰랐다.”

무경은 짧게 웃었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오.”

그는 사다리를 타고 중앙 축 아래로 내려갔다.

윤서는 제어판에 집중했다.

칼리온의 지각 타격파는 이미 백두산 아래 단층을 자극하고 있었다. 파형은 세 겹이었다. 낮은 주파수는 깊은 지각을 흔들고, 중간 주파수는 지하수층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높은 주파수는 인간이 만든 지하 구조물을 붕괴시키고 있었다.

정교했다.

잔인할 정도로 정교했다.

칼리온은 지구를 해부하고 있었다.

윤서는 그 해부칼을 빼앗아 되돌려야 했다.

“아키야마 박사님, 일본 해구 반응값 주세요.”

“이미 상승 중입니다. 12분 안에 임계치에 접근합니다.”

“리엄, 상공 타격기 위치?”

리엄은 남은 드론 한 대를 띄워 외부 영상을 받았다.

“타격기 14기. 모함 하부에 붉은 코어 노출. 하지만 방어막이 있습니다.”

세르게이가 말했다.

“방어막은 공진파로 흔들어야 깨진다. 그 뒤에 쏘면 된다.”

“남은 미사일은요?”

“두 발.”

두 발.

인류가 하늘의 모함을 향해 던질 마지막 돌멩이였다.

그때 제어실 바깥 복도에서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끌리는 발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개.

껍데기들이 오고 있었다.

태준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방어선 구축.”

남은 사람들은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세르게이는 화염방사기를 들었고, 리엄은 부상당한 팔을 묶고 소총을 장전했다. 마리암도 권총을 들었다. 그녀의 손은 떨렸지만,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복도 끝에 첫 번째 껍데기가 나타났다.

방호복을 입은 연구원이었다. 그 뒤로 병사, 기술자, 어린 견습 연구원, 머리가 반쯤 없는 경비원들이 걸어왔다. 그들의 몸은 죽었지만, 눈에서는 붉은 빛이 났다. 입에서는 같은 문장이 흘러나왔다.

“장례식은 시작되었다.”

태준이 방아쇠를 당겼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제어실 안에서 윤서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총성, 비명, 화염,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뒤섞였다. 누군가 쓰러졌고, 누군가 다시 일어났다. 껍데기들은 총에 맞아도 계속 기어왔다. 다리가 날아가면 팔로 기어왔고, 팔이 끊기면 몸통으로 꿈틀거렸다.

윤서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공진 주파수 동기화 43퍼센트.

칼리온 타격파 상승.

백두산 지하 압력 임계치 접근.

중앙 축 연결 대기.

무경의 무전이 들어왔다.

“한 박사. 중앙 축 하부 도착했소.”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여긴… 사람들이 많소.”

윤서는 손을 멈출 뻔했다.

“무슨 뜻이에요?”

무경은 숨을 몰아쉬었다.

“봉쇄 때 죽은 사람들이오. 다 여기 있소. 벽에도, 바닥에도…”

무전 너머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

무경이 계속 말했다.

“그들이 나를 보고 있소.”

윤서는 조용히 말했다.

“그건 칼리온이에요. 듣지 마세요.”

“알고 있소.”

무경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런데 어머니 목소리도 들리오.”

윤서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경 씨.”

“괜찮소. 이번에는 문을 열러 왔으니까.”

그 말과 함께 무경은 연결 작업을 시작했다.

제어실 문 앞에서는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세르게이는 화염방사기의 연료가 떨어지자 그것을 곤봉처럼 휘둘렀다. 리엄은 총알이 떨어진 뒤 칼로 껍데기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껍데기들은 죽은 자들이었고, 죽은 자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마리암이 검은 실에 다리를 붙잡혔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권총으로 자기 다리 옆 바닥을 쏘고, 칼로 실을 잘라냈다. 피가 흘렀지만 그녀는 기어서 다시 방어선으로 돌아왔다.

태준은 마지막 수류탄을 던졌다.

폭발이 복도를 흔들었다.

잠시 길이 열렸다.

그러나 폭발 연기 속에서 더 큰 것이 나타났다.

껍데기들이 서로 엉겨 붙은 덩어리였다. 사람의 몸 수십 개가 하나의 생물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팔들이 다리처럼 움직였고, 머리들이 꽃처럼 매달려 있었다. 각각의 입이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강태준.”

태준의 얼굴이 굳었다.

덩어리 가운데에서 한 얼굴이 앞으로 밀려나왔다.

젊은 여자였다.

태준이 잃어버린 아내의 얼굴.

윤서는 그것을 보고 태준의 손이 멈추는 것을 보았다.

“태준아.”

그 얼굴이 말했다.

“왜 나를 두고 갔어?”

태준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아내는 전쟁 첫해 대전 피난 통로에서 사라졌다. 그는 임무 때문에 곁에 없었다. 그 죄책감은 그를 지금까지 살아 있게도, 죽지 못하게도 만들었다.

괴물은 그 상처를 알고 있었다.

“나 아직 여기 있어.”

아내의 얼굴이 울었다.

“이리 와.”

태준의 총구가 내려갔다.

윤서가 외쳤다.

“태준 씨!”

그 순간 괴물의 팔들이 태준을 향해 뻗었다.

그러나 태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너는 내 아내가 아니야.”

그는 허리의 칼을 뽑았다.

“내 아내는 사람을 미끼로 쓰지 않아.”

태준은 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총알이 아니라 몸으로 시간을 벌었다. 칼이 살과 검은 실을 갈랐다. 괴물은 수십 개의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태준의 팔과 어깨에 검은 실이 박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윤서는 이를 악물고 계산을 계속했다.

공진 주파수 동기화 91퍼센트.

중앙 축 연결 70퍼센트.

칼리온 모함 코어 출력 상승.

백두산 압력 한계 초과 직전.

무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연결 완료까지 조금 남았소.”

“서둘러요!”

“한 박사.”

“네?”

“만약 성공하면…”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사람들에게 말해주시오. 북쪽에도 남쪽에도, 전쟁을 원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윤서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직접 말하세요. 돌아와서.”

무경은 웃었다.

“이 아래는 돌아가는 길이 없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무경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우리가 만든 무기가 마지막에는 사람을 살렸다고 말해주시오. 그래야 죽은 사람들이 조금은 덜 억울할 것 같소.”

윤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 화면에 초록색 표시가 떴다.

중앙 축 연결 완료.

윤서는 외쳤다.

“연결됐어요!”

무경의 무전기 너머로 수많은 목소리가 들렸다.

“가지 마.”

“문 열지 마.”

“우리도 데려가.”

“행성은 회수된다.”

그리고 무경의 마지막 목소리.

“지구는 너희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칼리온에게 하는 말이었다.

곧이어 중앙 축 아래에서 거대한 폭음이 올라왔다.

무경의 신호는 끊겼다.

윤서는 울 시간이 없었다.

최종 실행창이 열렸다.

경고문이 붉게 떴다.

“최대 공진 실행 시 화산 분화 가능성 89퍼센트.”

“주변 반경 생존률 급감.”

“지각 연쇄 반응 위험.”

“실행하시겠습니까?”

윤서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실행하면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었다.

실행하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

이런 선택은 너무 익숙했다. 전쟁 내내 인간은 이런 계산을 반복했다. 몇 명을 희생해 몇 명을 살릴 것인가. 어느 도시를 포기해 어느 전선을 지킬 것인가. 누구의 죽음이 더 가치 있는가.

윤서는 그 계산을 혐오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 버튼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버튼이 아니었다.

지구가 장례식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마지막 심장 박동이었다.

윤서는 무전기를 켰다.

남아 있는 모든 주파수로 목소리를 보냈다.

“여기는 지평 방어대. 백두산 지하에서 전 인류 생존 거점에 알립니다. 곧 대규모 지각 반격을 실행합니다. 강한 진동, 화산재, 전자기 교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 있는 사람은 즉시 개활지로 이동하십시오. 움직일 수 있다면 움직이십시오. 살아 있다면 서로를 버리지 마십시오.”

그녀는 잠시 멈췄다.

총성은 계속되고 있었다.

태준은 아직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윤서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실행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너무 깊은 곳에서 시작되어 인간의 감각이 따라가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두산 아래, 지구의 뜨거운 심장에 가까운 곳에서 낮은 울림이 태어났다. 그것은 기계의 소리가 아니었다. 폭발의 소리도 아니었다.

땅이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였다.

공진기의 세 겹 링이 천천히 회전했다. 검은 막들이 불에 타듯 벗겨졌고, 금속 표면에 푸른 빛이 돌았다. 지하 깊은 곳의 열과 압력, 물과 암석, 인간이 만든 기계와 지구의 오래된 힘이 하나로 맞물렸다.

칼리온의 붉은 타격파가 백두산을 찔렀다.

그 순간 지구가 되받아쳤다.

공진파는 땅속을 타고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칼리온이 심어놓은 파형을 거꾸로 잡아당기는 거대한 반향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힘이 지구 내부에서 방향을 잃고,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백두산 상공의 타격기들이 흔들렸다.

그들의 붉은 빛이 깜빡였다. 검은 금속 표면에 균열이 생겼다. 하나가 폭발했다. 폭발은 불꽃이 아니었다. 공간이 찢어지는 검은 파동이었다. 뒤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타격기가 찢어졌다.

윤서는 화면을 보며 외쳤다.

“먹히고 있어요!”

그러나 모함은 버티고 있었다.

하늘의 거대한 고리 구조물은 방어막을 펼쳤다. 붉은 막이 구름 위에 퍼지고, 공진파를 흡수하려 했다. 그 영향으로 지하 공진기의 출력이 다시 치솟았다.

아키야마가 소리쳤다.

“이대로면 백두산이 못 버팁니다!”

윤서는 빠르게 조정했다.

“리엄! 지금 쏴야 해요! 방어막 흔들리고 있어요!”

리엄은 지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미사일 발사 장치는 시설 외부에 있었다. 그러나 제어실 문 앞에는 아직 괴물이 있었다. 태준은 피투성이가 된 채 괴물의 움직임을 막고 있었다.

리엄이 말했다.

“길이 없습니다.”

태준이 괴물의 팔에 붙잡힌 상태로 외쳤다.

“내가 만든다!”

그는 허리의 마지막 폭약을 꺼냈다.

윤서가 그를 보았다.

“안 돼요!”

태준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윤서 씨.”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살아남아.”

그는 괴물의 중심부로 뛰어들었다.

폭발이 제어실 입구를 삼켰다.

열과 충격파가 사람들을 바닥에 내던졌다. 윤서는 귀가 멀 듯한 소리 속에서 태준의 이름을 외쳤지만, 자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연기와 먼지 속에서 괴물의 비명이 사라졌다.

입구가 열렸다.

리엄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마리암이 부상당한 몸으로 그를 따라갔다. 세르게이는 남은 탄약을 들고 그 뒤를 엄호했다.

윤서는 제어판 앞에 홀로 남았다.

아키야마는 옆에서 지진파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떨렸지만, 눈은 화면을 놓지 않았다.

“출력 94퍼센트. 더 올리면 위험합니다.”

“올려야 해요.”

“그러면 산이 터집니다.”

“조금만 더 버티게 할 수 있어요.”

“어떻게요?”

윤서는 칼리온의 파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칼리온은 지구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구를 데이터로 보았다. 밀도, 압력, 온도, 판 구조, 수분 함량. 그러나 지구는 단순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었다. 수십억 년 동안 움직이고, 부서지고, 회복한 살아 있는 역사였다.

윤서는 지구의 균열을 알았다.

약점이 아니라 숨구멍을.

“화산재 배출로 압력을 빼요. 분화는 피할 수 없지만, 폭발 규모를 줄일 수 있어요.”

아키야마가 그녀를 보았다.

“그건 이론상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은 모든 게 이론 밖이에요.”

그들은 함께 공진기 출력을 조절했다.

상공에서는 리엄이 미사일을 준비했다. 하늘은 붉은 빛과 검은 구름으로 갈라져 있었다. 칼리온 모함은 거대한 눈처럼 백두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인간 세 명이 마지막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리엄은 미사일 조준기를 잡았다.

전자 잠금은 불가능했다.

수동 조준.

바람은 불규칙했고, 땅은 계속 흔들렸다. 미사일 발사대는 금이 간 지면 위에서 삐걱거렸다. 마리암은 피 흘리는 다리로 발사대를 붙잡았다. 세르게이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면, 술을 좀 덜 마실걸.”

리엄이 웃었다.

“후회는 나중에 하십시오.”

“나중이 있으면.”

윤서의 목소리가 무전기로 들어왔다.

“지금!”

리엄은 첫 번째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흔들리는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칼리온 방어막이 그것을 지우려 했지만, 공진파 때문에 붉은 막은 갈라지고 있었다. 미사일은 방어막 표면에서 폭발했다. 완전한 타격은 아니었지만, 균열을 만들었다.

세르게이가 외쳤다.

“두 번째!”

리엄은 마지막 미사일을 겨눴다.

그 순간 칼리온 모함에서 얇은 빛줄기 하나가 내려왔다. 리엄을 향한 것이었다. 마리암이 그를 밀쳤다. 빛은 그녀의 왼쪽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팔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저 어깨 아래부터 회색 먼지로 흩어졌다.

마리암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리엄의 눈이 붉어졌다.

그는 마지막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첫 번째 폭발이 만든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함 하부의 붉은 코어에 박혔다.

잠시, 하늘이 멈춘 것 같았다.

그 뒤 빛이 터졌다.

모함 중심부의 붉은 고리가 안쪽으로 접히기 시작했다. 거대한 구조물 전체가 흔들렸다. 칼리온의 신호가 지구 전역에 비명처럼 퍼졌다. 그것은 처음으로 감정을 가진 소리였다.

공포.

칼리온도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윤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공진기의 출력을 최대로 밀어 올렸다.

지구의 반향이 하늘로 솟구쳤다.

칼리온 모함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고리들이 하나씩 깨지고, 검은 금속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거대한 구조물은 폭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심부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 생겨 그것을 삼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함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붉은 잔광과 떨어지는 검은 잔해뿐이었다.

동시에 전 세계의 칼리온 타격기들이 멈췄다.

서울 상공의 검은 물체들이 빛을 잃고 추락했다. 태평양 위의 고리 구조물이 스스로 접혀 사라졌다. 사막과 설원, 폐허와 바다 위에 떠 있던 정찰체들이 하나둘 침묵했다. 껍데기들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죽은 사람들이 다시 죽었다.

그러나 백두산도 한계에 도달했다.

산 정상에서 거대한 재기둥이 솟구쳤다. 검은 화산재가 하늘을 덮었고, 뜨거운 돌들이 비처럼 떨어졌다. 땅은 갈라졌고, 지하 시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윤서는 제어실에서 마지막 압력 조절을 마쳤다.

아키야마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가야 합니다!”

“조금만 더!”

“끝났어요! 이제 우리가 죽습니다!”

그 말이 맞았다.

윤서는 화면을 보았다.

칼리온 주파수 소멸.

지각 타격 중단.

연쇄 붕괴 위험 감소.

공진기 과열.

시설 붕괴 임박.

윤서는 손을 떼었다.

그녀와 아키야마는 무너지는 복도를 달렸다. 천장이 떨어지고, 배관이 터지고, 뜨거운 증기가 길을 막았다. 곳곳에서 검은 막들이 불타며 사람 목소리로 울었다. 칼리온 조직은 죽어가고 있었다.

“행성은…”

“회수…”

“오류…”

“오류…”

“오류…”

그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출구 근처에서 윤서는 멈췄다.

잔해 사이에 누군가 있었다.

태준이었다.

그는 무너진 벽 아래에 깔려 있었다. 몸은 피투성이였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윤서가 달려갔다.

“태준 씨!”

태준은 힘겹게 눈을 떴다.

“성공했나?”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일어나요.”

윤서는 잔해를 밀어내려 했지만, 너무 무거웠다. 아키야마도 도왔다. 그러나 천장은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태준은 윤서의 손을 붙잡았다.

“가.”

“싫어요.”

“명령이야.”

“이제 그런 거 없어요.”

윤서는 이를 악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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