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의령 우순경 사건, 하룻밤에 62명을 희생시킨 대한민국 최악의 총기 난사 참사
1982년 4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경남 의령군 궁류면에서 현직 경찰관 우범곤 순경이 총기와 수류탄으로 주민들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현장 사망자는 56명이었고, 부상자 중 6명이 이후 숨지면서 최종 사망자는 62명으로 기록되었다. 경찰의 무기 관리 부실과 초동 대응 실패가 겹친 대한민국 현대사의 비극적인 참사였다.
1. 사건 개요
우순경 사건은 1982년 4월 26일 밤부터 4월 27일 새벽까지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일대에서 벌어진 대규모 총기 난사 사건이었다.
범인은 당시 의령경찰서 궁류지서 소속 경찰관이었던 우범곤 순경이었다. 그는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소총 2정, 실탄 129발, 수류탄 6발 등을 탈취한 뒤 궁류면 4개리 일대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공격했다. 이 사건으로 현장에서 56명이 숨지고 39명이 부상했으며, 이후 부상자 중 6명이 추가로 사망해 최종 사망자는 62명으로 정리된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 사건이 아니라, 현직 경찰관이 국가가 관리해야 할 총기와 수류탄을 이용해 주민들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개인의 광기뿐 아니라 경찰 조직의 기강 해이, 무기 관리 부실, 늦은 출동, 국가의 책임 회피까지 함께 비판받았다.
2. 사건이 벌어진 배경
우범곤은 사건 당시 의령군 궁류지서에서 근무하던 경찰관이었다. 사건 당일 그는 동거 여성과 다툰 뒤 술을 마신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감정이 격해진 그는 지서로 향했고, 무기고에서 총기와 실탄, 수류탄을 꺼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단순히 “애정 문제 때문에 벌어진 범죄”로만 볼 수는 없었다. 당시 지서의 다른 경찰관들이 근무지를 이탈했고, 무기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범인이 경찰관이었기 때문에 무기고 접근이 쉬웠고, 주민들도 처음에는 그를 의심하지 못했다.
3. 범행 시작
우범곤은 먼저 자신과 다툼이 있었던 주변 인물들을 찾아갔고, 이후 마을 곳곳을 이동하며 총을 쏘기 시작했다.
당시 궁류면 마을들은 밤이었지만 불이 켜진 집이 많았다. 주민들이 반상회나 모임 때문에 여러 곳에 모여 있던 것도 피해가 커진 이유 중 하나였다. KBS 아카이브 영상에서도 이 사건을 “불이 켜진 집은 모두 표적이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범곤은 경찰복을 입은 현직 순경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처음부터 도망치거나 경계하기 어려웠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도움을 요청하러 온 경찰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총성과 폭발음이 마을을 뒤덮었다.
4. 마을 전체가 공격당했다
우범곤은 궁류면 일대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민가, 상점, 우체국, 장례식장 등 사람들이 있던 곳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특히 장례식장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서도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들은 총기 난사라는 상황 자체를 상상하기 어려웠고, 범인이 경찰관이라는 점 때문에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이 사건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마을을 연속으로 공격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단일 장소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보다 피해 범위가 넓었고, 구조와 대응도 더 어려웠다.
5. 경찰의 초동 대응 실패
우순경 사건에서 가장 크게 비판받는 부분은 경찰의 대응이었다.
당시 지서의 다른 경찰관들은 근무지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일부는 마을 행사나 개인 일정으로 자리를 비웠고, 지서장도 근무지를 떠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우범곤은 무기고에서 총기와 수류탄을 비교적 쉽게 꺼낼 수 있었다.
주민들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출동은 늦었다. 밤이라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이유 등으로 적극적인 대응이 지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결국 범인이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범행을 이어가는 동안 주민들은 사실상 스스로 피하거나 숨어야 했다.
6. 마지막 순간
27일 새벽, 우범곤은 한 민가에 들어갔다. 이후 수류탄을 터뜨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폭발로 그 집에 있던 주민들도 함께 희생되었다.
범인이 현장에서 사망하면서 정확한 범행 동기는 끝내 완전히 밝혀지지 못했다. 그래서 사건 이후에도 동거 여성과의 갈등, 술, 근무 불만, 성격 문제, 경찰 조직 내 스트레스 등 여러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개인의 분노만으로 끝낼 수 없는 참사였다는 점이었다. 총기와 수류탄을 다루는 경찰 조직의 관리 실패가 없었다면 피해 규모는 훨씬 줄어들 수 있었다.
7. 피해 규모
우순경 사건의 피해 규모는 자료마다 다르게 적힌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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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보도나 일부 공식 설명에서는 56명 사망으로 기록된다. 이는 사건 당시 현장에서 숨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본 수치다. 의령군의 42주기 위령제 관련 자료도 “주민 56명 사망”으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부상자 중 6명이 숨지면서 최종 사망자는 62명으로 정리된다. 2025년 보도에서는 “62명 사망, 33명 부상” 또는 “56명 사망, 39명 부상, 이후 6명 추가 사망”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건 당시 현장 사망자: 56명
부상자: 39명 안팎
이후 추가 사망자: 6명
최종 사망자: 62명
총 사상자: 약 95명 안팎
8. 사건 이후
사건 이후 정부와 경찰은 큰 비판을 받았다. 현직 경찰관이 무기를 탈취해 민간인을 공격했다는 점, 동료 경찰들이 근무지를 비운 점, 출동과 제압이 늦었다는 점이 모두 문제가 되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사건이 크게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보도 통제 분위기 속에서 사건은 빠르게 묻혔다. 의령군 자료에서도 당시 정권이 보도 통제로 사건을 덮었고, 유족들이 오랫동안 제대로 된 추모행사도 열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유족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공개적으로 슬픔을 말하기 어려웠다. 마을에는 매년 4월 26일과 27일이 되면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았고, 사건은 지역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9. 뒤늦은 위령제와 경찰 사과
2024년 4월 26일, 사건 발생 42년 만에 의령군 주최로 첫 공식 위령제가 열렸다. 의령 4·26 추모공원에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었고, 유족과 주민들이 참석했다.
2025년에는 사건 발생 43년 만에 경남경찰청장이 위령제에 참석해 유족들에게 사과와 위로의 뜻을 전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경찰이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 앞에 서는 의미 있는 변화였다.
10. 결론
우순경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총기 난사 사건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한 경찰관의 범행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경찰의 무기 관리 실패, 근무 기강 붕괴, 늦은 초동 대응, 당시 정권의 침묵이 겹쳐 피해를 키운 참사였다.
현장 사망자 56명, 최종 사망자 62명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가족과 이웃을 잃은 사람들의 삶이 무너진 기록이었다.
우순경 사건은 지금도 “국가가 관리해야 할 무기가 잘못된 사람의 손에 들어갔을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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