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 총정리: 684부대의 탄생부터 대방동 총격전 >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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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총정리#684부대의#탄생부터#대방동#총격전
요약실미도 사건: 국가가 만들고 국가가 지운 684부대의 비극 1. 사건 개요 실미도 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 실미도에서 북한 침투 작전을 위해 훈련받던 684부대 공작원들이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한 뒤,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다가 군·경과 교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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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미도 사건: 국가가 만들고 국가가 지운 684부대의 비극

    1. 사건 개요

    실미도 사건은 1971년 8월 23일,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 실미도에서 북한 침투 작전을 위해 훈련받던 684부대 공작원들이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섬을 탈출한 뒤,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하다가 군·경과 교전을 벌인 사건이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 시도, 이른바 1·21 사태 직후 만들어졌다.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까지 침투하자, 한국 정부도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김일성 암살 또는 북한 핵심부 침투 작전을 준비했다. 그 목적으로 창설된 비밀부대가 바로 실미도 부대, 흔히 말하는 684부대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부대를 209파견대, 684특공대, 오소리공작대 등으로도 불렸다고 설명한다. 


    사건 당일 공작원들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했다. 이후 인천에 상륙해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했고,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과 마지막 교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공작원 다수와 경찰, 민간인이 사망했다. 생존한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2. 배경: 1·21 사태와 보복 작전의 시작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까지 침투했다. 이들은 청와대 인근까지 접근했으나 경찰 검문과 교전 끝에 대부분 사살되거나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청와대 습격 시도를 단순한 도발이 아니라 국가원수를 겨냥한 직접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한국 정부 내부에서는 북한에 같은 방식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힘을 얻었다. 그 결과 중앙정보부와 공군이 관여한 비밀 특수공작 부대가 창설되었다.


    실미도 부대는 1968년 4월 1일 만들어졌다. 그래서 훗날 이 부대를 684부대라고 불렀다. ‘68년 4월’에서 따온 명칭이라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부대가 중앙정보부의 특수공작 지시에 따라 창설되었고, 중앙정보부가 예산 지원과 훈련 점검을 맡았으며 공군이 운영과 훈련을 담당했다고 설명한다. 


    처음 계획상으로는 사형수들을 선발해 작전에 투입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법적 문제 등으로 인해 실제로는 민간인들이 모집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사회 주변부에 있던 청년, 전과자, 무직자 등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는 사형수들이 강제로 끌려간 듯 묘사되지만, 실제 기록상으로는 ‘민간인 공작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KBS 공개 영상 자료도 “실미도 부대원은 모두 민간인”이었다는 점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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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실미도라는 공간

    실미도는 인천 중구 무의도 근처에 있는 작은 섬이다. 당시에는 외부와 단절된 훈련장으로 쓰이기 적합했다. 부대원들은 그곳에서 군번도, 계급도, 공식 신분도 불분명한 상태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정규군처럼 공개적으로 존재하는 병력이 아니었다. 국가가 만들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비밀부대였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오랫동안 은폐되었다. 실미도 사건이 1971년에 벌어졌음에도, 부대의 실체가 널리 알려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실미도에서의 훈련은 매우 혹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침투, 사격, 폭파, 생존, 격투, 수영, 산악훈련 등 북한 침투를 상정한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문제는 이들이 작전 투입을 기다리는 동안 보급과 처우가 악화되었고, 약속된 보수나 미래에 대한 보장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4. 부대원들의 처우와 내부 붕괴

    684부대원들은 국가의 비밀공작에 동원되었지만, 정식 군인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민간인으로 모집되었으나 섬에 사실상 감금된 상태에서 훈련을 받았다. 임무가 성공하면 돈과 신분 보장, 새 삶을 받을 수 있다는 식의 약속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약속은 점점 불투명해졌다.


    1968년 이후 남북관계는 계속 긴장 상태였지만, 1970년대 초로 가면서 무조건적인 보복 침투 작전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 되었다. 남북 간 대화 분위기도 조금씩 생겼고, 김일성 암살 같은 극단적 작전은 실행 가능성이 낮아졌다.


    부대원들 입장에서는 상황이 절망적이었다. 작전은 계속 미뤄지고, 섬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정식 군인도 아니며,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훈련 중 사망자도 발생했고, 내부 통제는 폭력적으로 흘러갔다.


    월간조선이 정리한 생존 기간병 증언과 당시 기록에 따르면, 전체 31명 중 일부는 훈련 과정에서 사망했고, 사건 당일 실미도를 탈출한 인원은 23명으로 기록된다. 해당 기사에서는 31명 중 7명이 훈련 중 사망했고, 1명은 난동 당시 사살되었다고 설명한다. 


    다만 자료마다 사건 당일 움직인 인원을 22명, 23명, 24명 등으로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당시 정부 발표가 축소·왜곡되었고, 부대 자체가 비밀조직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일관되지 않은 데서 생긴 문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공작원 24명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탈출했다고 정리하고, 경향신문의 2024년 보도는 공작원 22명이 기간요원을 살해하고 서울로 진입했다고 설명한다. 

     

     

     

     

     

    5. 1971년 8월 23일: 탈출과 서울 진입

    1971년 8월 23일 오전, 실미도 부대원들은 행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기간병들을 공격해 다수의 사망자를 냈고, 무기와 탄약을 확보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오전 6시경 공작원들이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면서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월간조선 기사에 따르면, 실미도를 장악한 훈련생들은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탄약고를 폭파한 뒤 무의도로 건너갔다. 이후 주민에게 교육대장이 급성 맹장염에 걸렸다는 식으로 말하며 배를 빌리려 했다는 증언도 소개된다. 이들은 결국 어선을 이용해 인천 송도 유원지 앞 독배부리 해안 쪽으로 상륙했다. 


    상륙 후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중간에 군 초소와 충돌했고, 인천 지역에서 첫 총격전이 벌어졌다. 월간조선이 인용한 당시 군 지휘관 회고에 따르면, 낮 12시 56분 무렵 버스를 타고 나타난 이들이 정지 명령에 불응했고, 버스 안에서 사격이 벌어졌다. 이후 버스가 고장 나자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서울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들의 목적지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흔히 “청와대로 향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서울 중심부로 가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경향신문은 이들이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로 향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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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 앞 총격전

    실미도 공작원들이 탄 버스는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당시 유한양행 본사 앞까지 진입했다. 이곳에서 군과 경찰의 저지선에 막혔다.


    월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버스는 오후 2시 23분 무렵 유한양행 정문 근처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췄다. 이후 버스 내부에서 수류탄 폭발이 일어나 공작원 대부분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일부는 체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교전으로 경찰 2명, 민간인 6명, 공작원 20명이 사망했고, 생존 공작원 4명이 군법회의에 넘겨졌다고 정리한다. 


    경향신문의 2024년 보도는 교전으로 실미도 부대 공작원 18명, 경찰 2명, 민간인 6명이 숨졌고, 살아남은 공작원 4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설명한다. 


    사망자 숫자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당시 사건이 군사기밀로 다뤄졌고, 정부 발표와 실제 조사 내용, 후대 보도 사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이 단순한 탈영이나 무장 난동이 아니라, 국가가 비밀리에 만든 특수공작 부대가 작전 폐기와 열악한 처우 속에서 폭발한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7. 생존자 4명과 사형

    대방동 교전 뒤 살아남은 공작원 4명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이들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결과, 공군은 사형 집행 사실을 가족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시신도 유가족에게 인도하지 않았다. 사형당한 공작원 4명의 시신은 암매장되었다. 진실화해위는 이를 당시 군행형법과 시행령을 위반한 불법 행위이자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판단했다. 


    이 대목은 실미도 사건의 핵심 비극이다. 국가가 비밀공작을 위해 민간인을 모집했고, 그들을 섬에 가둬 혹독한 훈련을 시켰으며, 작전이 사실상 무산된 뒤에는 이들을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다. 끝내 사건이 터지자 생존자들을 사형시켰고, 그 죽음조차 가족에게 숨겼다.

     

     

     

     

     

    8. 정부의 은폐와 뒤늦은 진상 규명

    실미도 사건은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당시 정부는 사건의 성격을 축소하거나 왜곡했고, 부대의 존재 자체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 중 하나는 2003년 개봉한 영화 《실미도》였다. 영화는 극적 각색이 많았지만, 숨겨져 있던 684부대의 존재를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언론과 유가족, 시민사회가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정부 차원의 조사가 뒤따랐다.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이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등을 통해 실미도 부대의 창설 배경, 훈련, 사건, 사형 집행과 암매장 문제가 조금씩 드러났다. 진실화해위는 2022년 사형당한 공작원 4명의 암매장을 중대한 인권침해로 판단했고, 유해 발굴과 국가 사과 등을 권고했다. 


    2024년 10월 15일, 국방부는 사건 발생 53년 만에 실미도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국방부 장관의 사과문은 경기 고양시 벽제묘지에서 열린 유해 발굴 개토제 자리에서 대독되었다. 사과문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이 겪은 고통과 슬픔에 대해 사과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9. 영화 《실미도》와 실제 사건의 차이

    영화 《실미도》는 이 사건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상업영화이기 때문에 실제 사건과 다른 설정이 있다.


    영화에서는 사형수들이 비밀리에 끌려와 작전에 투입되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조사와 보도에서는 부대원들이 모두 민간인이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또한 영화 속 인물과 갈등 구조, 일부 훈련 장면, 마지막 장면은 극적 효과를 위해 재구성된 부분이 많다.


    실제 사건에서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나쁜 사람이었나”라는 단순한 구도가 아니다. 부대원들은 기간병들을 살해했고,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과 경찰도 사망했다. 동시에 그들 역시 국가폭력과 비밀공작 체계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실미도 사건은 가해와 피해가 복잡하게 얽힌 비극으로 봐야 한다.

     

     

     

     

     

    10. 사건의 의미

    실미도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첫째, 냉전과 남북 대결이 극단으로 치닫던 시기, 국가는 법적·윤리적 통제를 벗어난 비밀공작을 추진했다.


    둘째, 민간인들이 국가의 비밀작전에 동원되었지만, 정식 신분과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셋째, 작전이 지연되거나 폐기되는 상황에서 국가는 이들을 책임 있게 처리하지 않았다.


    넷째, 사건 이후에도 진실은 오랫동안 은폐되었고, 사형당한 생존자들의 시신마저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다섯째, 사건 발생 50년이 넘어서야 국가의 공식 사과와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실미도 사건은 단순히 “북파공작원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만든 비밀부대가 국가에 의해 방치되고, 결국 국가와 충돌한 사건이다. 또한 분단체제와 군사독재, 비밀공작, 인권침해가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다.

     

     

     

     

    11, 실미도 684부대의 ‘옥천파’ 이야기

    1. 어느 날 사라진 옥천 청년들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 뒤 한국 정부는 북한에 대한 보복 작전을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비밀부대가 실미도 684부대였다.


    이 무렵 충북 옥천에서는 젊은 남자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돈 벌러 간 줄 알거나, 군대에 간 줄 알거나, 어디론가 취업한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사망 통지도, 입대 통지도, 행방 설명도 없었다.


    훗날 국방부는 36년 전 충북 옥천에서 행방불명된 박기수 씨 등 청년 7명이 모두 실미도 684부대 창설요원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고 공식 확인했다. 즉, 가족들이 수십 년 동안 찾던 청년들이 실은 국가 비밀부대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2. 왜 옥천 청년들이 실미도로 갔나

    실미도 684부대는 정규군 부대가 아니었다. 북한 침투와 김일성 암살 같은 극비 임무를 상정하고 만든 공작부대였다. 그래서 일반적인 징집 절차가 아니라, 비밀리에 사람을 모았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사형수들이 끌려간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민간인들이 상당수 모집되었다. 옥천 출신 청년 7명도 그런 방식으로 실미도 부대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된다. 국방부는 이들이 684부대 창설요원 명단에 있었다고 유족에게 통보했다. 


    옥천 사람들 입장에서는 더 참혹했다. 청년들이 “국가 임무”에 동원됐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가족들은 실종 신고와 수소문을 반복했지만, 부대 자체가 비밀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3. 박기수의 쪽지

    옥천파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 박기수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부대원들이 섬을 탈출해 인천을 거쳐 서울로 향했다. 이들은 버스를 탈취해 이동했고,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과 대치하게 된다.


    그때 박기수는 버스 안에 있던 한 여성 승객에게 자신의 이름과 옥천 집주소를 알려주며 가족에게 연락해 달라는 취지의 쪽지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KPI뉴스는 이 장면을 두고 박기수가 “제 이름은 박기수”라며 옥천 집주소로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뒤늦게 신문에 실렸고, 이를 본 가족들이 수소문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실미도 부대원들은 오랫동안 “무장괴한”이나 “난동자”처럼 보도되었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이름과 고향을 남기고 싶어 했다. 가족에게 “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만이라도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4. 옥천 7명 전원 확인

    2004년, 국방부는 충북 옥천에서 사라진 청년 7명이 모두 실미도 684부대원이었다고 공식 확인했다.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국방부는 민원인이 제기한 실종자 7명의 행방을 조사했고, 이들이 모두 684부대 창설요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유족에게 통보했다. 


    매일경제 보도도 같은 내용을 전했다. 국방부는 실종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실미도 부대원 명단 등을 대조해 5명을 먼저 확인했고, 이후 나머지 2명도 684부대원으로 최종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들 중 1명은 체포 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된 사실도 함께 확인되었다. 


    이 확인은 유족들에게는 너무 늦은 진실이었다. 1968년에 사라진 사람들이 2004년에야 “실미도 부대원이었다”고 확인된 것이다. 무려 36년이 지난 뒤였다.


    5. 옥천 청년 7명의 운명

    옥천 출신 7명은 모두 실미도 부대에 들어갔지만, 그들의 최후는 같지 않았다.


    일부는 실미도 훈련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일부는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탈출과 서울 진입 과정에서 사망했다. 또 일부는 살아남아 체포된 뒤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MBC는 실미도 생존자 4명이 1972년 3월 10일 서울 구로구의 공군 2325 정보부대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는 증언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사형 이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사형 집행 사실이 가족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시신도 돌아오지 않았다. 유족들은 가족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른 채 수십 년을 보내야 했다.


    6. 왜 ‘옥천파’가 특별히 주목받았나

    실미도 부대원들은 전국 여러 지역에서 모집되었다. 그런데 옥천 출신 7명이 특별히 주목받은 이유는, 한 지역에서 여러 명이 한꺼번에 사라졌고, 그 가족들이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진상규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또 박기수의 쪽지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옥천 출신 실미도 부대원”의 존재가 강하게 부각되었다. KPI뉴스는 실미도 부대가 옥천 7명뿐 아니라 파주에서도 7명을 집단 포섭했다는 내용을 보도하면서, 실미도 부대 모집이 특정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을 다뤘다. 


    즉 ‘옥천파’는 영화 속 조폭 같은 파벌이 아니라, 실미도 부대에 끌려가거나 모집되어 돌아오지 못한 옥천 청년들의 집단적 비극을 상징하는 말에 가깝다.


    7. 가족들의 36년

    가족들에게 가장 잔인했던 것은 죽음보다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군대에 갔는지, 범죄에 연루됐는지, 해외로 갔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국가가 데려갔지만 국가는 말하지 않았다. 실미도 부대가 공식적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가족들은 실종자 가족으로 살아야 했다.


    2004년 국방부의 확인 뒤 유족들은 “뒤늦게나마 실체가 밝혀져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명예회복과 시신 인계를 요구했다. 경향신문은 실미도진상규명대책위원회 측이 사망 경위와 유해 처리,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이건 단순히 가족을 잃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왜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살아야 했다. 그 침묵 자체가 또 하나의 폭력이었다.


    8. 옥천파 이야기가 남긴 의미

    옥천파 이야기는 실미도 사건을 더 개인적인 비극으로 보이게 만든다.


    실미도 사건을 숫자로만 보면 “부대원 몇 명 사망, 경찰 몇 명 사망, 민간인 몇 명 사망” 같은 기록으로 끝난다. 하지만 옥천 청년 7명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그 숫자 뒤에 있던 가족과 고향, 이름, 주소, 마지막 부탁이 보인다.


    박기수가 버스 안에서 남겼다는 쪽지는 그래서 상징적이다. 그는 국가 비밀부대의 공작원이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그저 옥천에 가족을 둔 한 사람이었다.


    실미도 사건의 핵심은 “북파공작원들이 왜 난동을 일으켰나”만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이들을 데려갔는가.

    누가 이들의 존재를 지웠는가.

    왜 가족들은 36년 동안 아무것도 듣지 못했는가.


    옥천파 이야기는 바로 그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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