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겨울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매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IMF.”
“구조조정.”
“부도.”
“실직.”
어린 나는 그 말들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다만 어른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말수가 줄었고, 어머니는 밤마다 장롱 깊숙한 곳에서 통장을 꺼내 오래 들여다보았다.
집 안은 난방을 틀어도 이상하게 차가웠다.
마치 겨울이 집 안까지 들어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일이 시작된 건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고 온 날이었다.
그날 밤, 우리 집 현관 앞에 검은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투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우표도, 주소도, 이름도 없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누가 잘못 놓고 간 거겠지.”
하지만 어머니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보… 저거 열지 마.”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봉투를 집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봉투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의 차례입니다.”

처음엔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수화기 너머로 아주 낮은 숨소리만 들려왔다.
“후우… 후우…”
어머니가 전화를 끊으면, 곧바로 다시 울렸다.
받으면 또 숨소리.
끊으면 다시 전화.
그날 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리고 현관에 주저앉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회사에서도 봤어…”
어머니가 물었다.
“뭘 봤는데?”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봉투.”
회사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사람들 책상 위에는 모두 검은 봉투가 놓여 있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인사팀에서 보낸 문서인 줄 알았지만, 그 안에는 전부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신의 차례입니다.”
그 봉투를 받은 사람들은 며칠 안에 회사에서 사라졌다.
누군가는 고향으로 내려갔고, 누군가는 연락이 끊겼고, 누군가는 아무도 모르게 이사를 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아무도 그 봉투를 누가 놓고 갔는지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우리 집에도 변화가 생겼다.
밤 12시가 되면 현관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뚜벅.
누군가 계단을 천천히 올라오는 소리였다.
우리 집은 4층이었다.
발소리는 1층에서 시작해 2층, 3층을 지나 정확히 우리 집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문틈 아래로 무언가가 밀려 들어왔다.
검은 봉투였다.
이번에는 봉투 안에 종이가 두 장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빚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두 번째 종이에는 낯선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대출금, 이자, 연체료, 카드값, 보증금…
이상한 건 그 숫자들이 실제 우리 집 사정과 너무나 비슷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종이를 보자마자 손을 떨었다.
“이걸… 누가 알고 있는 거야?”
어머니는 울면서 종이를 찢어버렸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찢어진 종이 조각들은 식탁 위에 다시 붙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찢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 후로 아버지는 점점 이상해졌다.
밤마다 거실에 앉아 아무것도 없는 벽을 바라봤다.
가끔은 누군가와 대화하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번 달 안에는 꼭 갚겠습니다.”
“제발 가족만은…”
어머니가 누구와 이야기하냐고 묻자, 아버지는 멍한 얼굴로 말했다.
“저기 있잖아.”
아버지가 가리킨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봤다.
거실 구석, 불 꺼진 장식장 옆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그것은 사람 같기도 했고,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양복을 입고 있었다.
한 손에는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새벽에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 아침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현관에는 아버지의 구두가 없었다.
대신 검은 봉투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상환 완료.”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돌아왔다.
하지만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말투도, 걸음걸이도, 눈빛도 전부 아버지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그림자였다.
전등 아래에 서 있어도 아버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자다가 이상한 소리에 눈을 떴다.
거실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사락.
사락.
사락.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내다보니,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수십 장의 검은 봉투가 쌓여 있었다.
아버지는 봉투 하나하나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나는 그 글씨를 보고 숨을 멈췄다.
“당신의 차례입니다.”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내가 알던 아버지의 웃음이 아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 시절을 사람들은 경제 위기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숫자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뉴스 화면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겨울, 정말 무서웠던 것은 돈이 아니었다.
사람의 얼굴에서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가족이 서로 눈치를 보며 숨죽이는 밤이었다.
그리고 현관 앞에 놓여 있던 검은 봉투였다.
얼마 전, 오래된 집을 정리하다가 낡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아버지가 쓰던 수첩과 오래된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검은 봉투 하나가 있었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 당신이 기억할 차례입니다.”
그날 밤부터, 우리 집 현관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뚜벅.
그리고 문틈 아래로 검은 봉투가 밀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