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의 이야기다.
여름방학이 되면 아버지 쪽 조부모님 댁에서 지내는 것이 매년의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집에서 조부모님 댁까지는 자전거로 2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옷이나 만화책처럼 당장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고, 학교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마다 집 근처까지 돌아오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어머니에게서 자주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럴 거면 굳이 거기서 자는 의미가 있어?”
지금도 그 말이 기억난다.
확실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조부모님 댁은 아주 오래된 집이었다. 나는 그 낡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특히 그 집에서 보내는 밤을 좋아했다.
주변에는 가로등도 별로 없었고 자동차 소리나 바깥을 걸어 다니는 사람도 드물었다. 툇마루에 앉아 평소보다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벌레 우는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일과였다.
가끔 할아버지가 사 오신 불꽃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조부모님 댁에서 매일 한가롭게 밤을 즐기던 어느 날이었다.
밭일에 지치셨는지 조부모님은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문단속은 꼭 해야 한다.”
그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신 두 분과 달리 나는 평소처럼 툇마루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가 있었지, 수박이 먹고 싶다,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시야 오른쪽 끝에 들어온 하얀 무언가를 발견했다.
무엇인가 싶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생울타리 바깥에 하얀 옷을 입은 긴 머리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에 저곳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길을 잃은 것일까.
말을 걸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여자는 어느새 걷기 시작하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 며칠 뒤에는 그 여자에 관한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조부모님은 옆집에 노래방을 하러 가셨다. 옆집이라고 해도 약 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나도 함께 가자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곳의 노래방은 가게에 있는 노래방 기계와는 달랐다. 수록된 노래도 적었고 내가 아는 노래도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는 ‘강물의 흐름처럼’ 정도였다.
노래방에서 준비했을 초밥은 조금 끌렸지만, 혼자 집을 지키며 자유롭게 지내는 편이 더 좋았다.
나는 조부모님이 노래방에 가기 전에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주먹밥을 저녁으로 먹었다. 잠시 텔레비전을 본 뒤 툇마루로 향했다.
쟁반 위에는 보리차와 센베이를 올려놓았다. 느긋하게 밤을 보낼 준비는 완벽했다.
조부모님은 지금쯤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계실까.
역시 초밥은 먹고 싶은데, 남은 것을 받아 오시지는 않을까.
그런 먹을 것에 관한 생각을 하며 툇마루에서 다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문득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잠들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조부모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까 준비해 둔 보리차 컵이 넘어져 내용물이 쏟아져 있었다. 잠든 사이 내가 건드려 넘어뜨린 모양이었다.
보리차가 아깝기도 했고, 걸레를 가지러 가는 것도 귀찮았다. 기분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두고 보리차가 마르기만 기다릴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부엌에서 걸레를 찾아 빠르게 닦기 시작했다.
대충 다 닦고 얼굴을 들었을 때였다.
생울타리 바깥에 다시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아마도 처음 보았을 때보다 조금 왼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여자는 여전히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기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언제부터 저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방금 온 것일까.
내가 걸레를 가지러 갔을 때 온 것일까.
내가 깨어났을 때부터 있었던 것일까.
내가 잠들어 있을 때부터?
아니면…….
지난번처럼 곧 걸어가 어딘가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곳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나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원래부터 유령이나 요괴 같은 존재를 믿지 않았고, 너무나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인지 오히려 두렵지 않았다.
“저기요…… 무슨 일 있으세요?”
대답은 없었다.
여자는 여전히 반대쪽을 향한 채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나처럼 밤하늘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며 산책하던 중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말을 걸었다.
“산책 중이세요? 달도 예쁘고 밤바람도 기분 좋네요.”
역시 대답은 없었다.
사람이 걱정돼 말을 걸었는데 무시하다니 정말 예의 없는 여자라고 속으로 욕했다.
그때 여자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를 향해 말하는 것인지,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여자가 무엇을 중얼거리고 있는지 궁금해진 나는 가까이 다가가기로 했다.
항상 툇마루에 놓여 있던 할아버지의 슬리퍼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갔다.
툇마루에서 생울타리까지는 6미터에서 7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다시 여자를 바라보자 아주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기요?”
계속 중얼거리며 좌우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면 조부모님께 연락해야 했다.
나는 말을 걸며 한 걸음씩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내가 다가갈 때마다 여자가 흔들리는 폭도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흔들흔들.
흔들흔들.
흔들흔들.
아, 이 사람은 정말 위험할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흔들리는 여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으면서도 나는 여자에게 말을 거는 것도,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아마도 무서운 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으…… 으으…….”
하지만 나는 곧바로 그 행동을 후회했다.
여자는 반대쪽을 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계속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크게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긴 머리카락도 함께 흔들렸다.
머리카락 사이로 코가 보였다.
입이 보였다.
그리고 두 눈이 보였다.
불과 1미터 정도 앞까지 다가간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공포 때문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계속 흔들리는 여자와 눈을 마주친 채 그곳에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여전히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도…….
어느새 여자가 흔들리는 폭은 더욱 커져 있었다.
이제는 ‘흔들흔들’이 아니라 ‘휘청휘청’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정도였다.
여자가 생울타리 위로 손을 뻗었다.
무서웠다.
붙잡힐 것 같았다.
“○○야, 초밥 받아 왔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현관 쪽에서 귀에 익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순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눈앞의 여자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집 쪽으로 돌렸다.
곧 초밥이 담긴 밀폐 용기를 든 할머니가 얼굴을 내밀었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너는 정말 이곳을 좋아하는구나.”
“할머니…… 방금…… 여자 한 명이…….”
나는 여자가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온몸을 덜덜 떨며 방금 보았던 일을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그거 울타리 씨였을 거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할아버지가 내가 보았던 여자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 존재는 ‘울타리 씨’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 나타나는 요괴와 비슷한 존재라고 했다.
※ ‘垣根さん’은 직역해 ‘울타리 씨’로 옮겼다. 한국 괴담 제목처럼 다듬으면 ‘생울타리 너머의 여자’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름처럼 울타리 너머에서 이쪽을 바라보기만 할 뿐, 특별히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무서운 일을 겪었는데도 해를 끼치지 않는 존재라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음 날, 내가 지나치게 무서워하자 할아버지는 나를 O 씨라는 사람의 집으로 데려갔다.
나는 어두운 방으로 안내받았다. 방 안에는 거울 하나만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아마도 액막이나 퇴마와 비슷한 의식을 받았다.
O 씨는 매우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자랑하는 우유 한천을 대접해 주었고, 마지막에는 부적도 하나 건네주었다.
조부모님과 O 씨는 모두 내게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서워 견딜 수 없었다.
원래는 며칠 더 조부모님 댁에서 느긋하게 지낼 예정이었지만, 그날 바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밤을 좋아했다.
조부모님 댁에서 보내는 밤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무서웠다.
그날 이후 10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무서워서 조부모님 댁에 거의 가지 않았다.
설날이나 추석처럼 반드시 방문해야 할 때에도 낮에만 다녀왔다.
밤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 달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때문에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 댁에서 머물며 밤샘을 하게 되었다.
무서워서 할 수 없다는 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10년도 더 지난 일이었고 무섭다는 감정도 거의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그 사건 이후 조부모님 댁을 자주 찾지 않았고, 두 분과 제대로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후회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눌 걸 그랬다.
나는 할아버지의 머리맡에서 아버지에게 그동안 생각했던 것을 털어놓았다.
일종의 참회였다.
아버지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이야기냐?”
시간은 곧 밤 12시가 되려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기억이 났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할아버지와 O 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에게도 친구에게도 그 여자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
빨리 잊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10년이 넘은 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O 씨에게 퇴마 의식 같은 것을 받았던 일과 부적을 건네받았던 일도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리는 것이 보였다.
내 이야기가 끝날 무렵 아버지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그 고함에 옆방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와 남동생, 할머니까지 잠에서 깨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나도, 어머니도, 남동생도, 할머니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두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할 뿐이었다.
“너는 아침이 될 때까지 절대로 이 방에서 나가지 마. 화장실도 가지 마! 절대로 나가면 안 된다!”
그 말을 남긴 아버지는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영문도 모른 채 남겨진 가족들에게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랬지”라며 중간중간 맞장구를 쳤다.
잠시 후 아버지는 T 씨와 K 씨를 데리고 돌아왔다.
T 씨와 K 씨는 아버지의 어릴 적부터 이어진 절친한 친구들이었다.
평소에도 가족끼리 함께 캠핑을 다니는 등 나 역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도 아버지처럼 파랗게 질려 있었다.
“괜찮을 거야. 일단 아침까지만 버티자.”
“아버지에게는 이미 연락해 뒀어. 아침이 되면 바로 오라고 했어.”
“이런 한밤중에 미안하다. T에게도, K에게도, T 아버님께도 정말 감사하다.”
나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까지 다급해하는 것일까.
세 사람은 순식간에 방 안 곳곳에 부적을 붙였다.
방 네 귀퉁이에는 소금까지 수북하게 쌓아 놓았다.

마침내 T 씨는 내 정면에 앉아 경전과 비슷한 것을 외우기 시작했다.
솔직히 모든 것이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남동생, 할머니 역시 멍하니 아버지 일행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상태는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당연히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원래라면 나도 아침부터 할아버지의 장례 준비를 도와야 했다.
하지만 나는 T 씨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제대로 된 설명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T 씨, K 씨의 모습을 보면 무언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세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T 씨의 집에 도착하자 T 씨의 아버지가 모든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로 T 씨의 집은 신사였다.
그렇게 큰 신사는 아니었지만 주변에서는 제법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나는 안쪽에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고 그곳에서 퇴마 의식이 시작되었다.
잠을 자지 못해 정신이 흐렸기 때문인지 자세한 내용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T 씨 아버지의 진지한 얼굴과 아버지, T 씨, K 씨가 필사적으로 기도하던 모습뿐이다.
의식이 끝나고 방 밖으로 나온 것은 정오가 가까워진 뒤였다.
아버지는 T 씨의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급히 할아버지 댁으로 돌아갔다.
나도 함께 가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말했다.
“너는 당분간 그 집에 오지 마라.”
결국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은 그대로 T 씨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런 일이 벌어졌지만 누구에게도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그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나 자신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T 씨의 아버지가 조금이나마 설명해 준 내용이 있어 이곳에 적어 둔다.
본래 ‘울타리 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사람을 바라보기만 하는 무해한 존재가 아니다.
옛날에는 울타리 씨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존재했다.
어쩌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았다.